은애하는 문상민
떠나며 단단해진 문상민의 마음.

촬영을 준비하면서 열일곱의 문상민이 가족의 품을 떠나는 모습이 계속 떠올랐어요. 정말 오랜만에 고향 청주를 떠나던 제 얼굴이 어땠는지 떠올려봤어요. 기찻길, 버스 정류장,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를 오가며 촬영했잖아요. 모두 처음 가보는 장소인데, 서울을 향하는 버스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그때 기분이 떠올랐어요.
버스 창에 비치던 모습도 기억해요? 버스에서 엄청 울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갈지 막연한 불안함보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가서 뭐든 꼭 이루겠다는 긍정적 설렘이 더 컸는데, 버스 창 너머로 부모님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계실 부모님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뭉클했어요.
요즘엔 어때요? 여전히 갈 때마다 울컥해요? 요즘엔 내려가도 계획보다 하루나 이틀 일찍 서울로 돌아와요. 서울에서 할 일이 많은데, 청주에 있으면 긴장이 풀리거든요. 게을러질까 봐 오래 못 있어요. ‘상민아,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하며 갑자기 기차표 끊어서 오고 그래요. 마지막으로 다녀온 지 2년이 다 돼가는 것 같아요.
의외로 매정한데요? 원래 집에서 애교쟁이거든요. 부모님이랑 드라이브도 다니고, 할머니·할아버지도 먼저 뵈러 가자 하고. 그런데 좋은 아들과 배우 둘 다 완벽히 하기엔 아직 서툴러요. 가족이 이해해주기도 하고요. 또 형이 대신 제 자리를 잘 메워줘서 마음 편히 일에 매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형 이야기를 하는 순간 되게 자랑스러워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형이 저희 가족의 중심축이에요. 서운한 게 있으면 형한테 말해요. 그럼 다 들어주고, 해결해주거든요. 제가 사람들한테 살갑게 구는 것도 그 영향이 묻어난 거예요. 두 살 터울이라 친한 친구같은 존재이기도 하고요. 사람들은 제가 가족의 자랑일 거라 생각하지만, 저희 식구의 진짜 비타민은 형이에요.


20대 중반은 오해하기 쉬운 나이인 것 같아요. 모든 걸 책임지고 이끌어야 하는 나이라고 오만하게 생각했죠. 근데 저한테 그 정도를 바라는 사람은 없어요. 더 부딪쳐보고, 도전해보고, 실수해서 혼나기도 하고, 반성하고 다시 일어나도 되는 나이인데, 어느 순간 능숙하다고 착각한 거죠.
청주에 갈 때마다 꼭 들르는 곳은 없어요? 마음의 안식처 같은 곳. 제가 다닌 중학교 운동장요. 시간이 지나도 크게 바뀐 게 없거든요. 거기 가면 마음이 좀 놓여요. 집에서 학교에 가려면 시장을 하나 지나야 하는데, 먹을거리도 다양하고 친구들이랑 장난치면서 다니던 곳이라 추억이 많아요. 시장 이름이 뭐더라?
(“복대시장.” 옆에 있던 매니저가 자기가 살던 동네인 것처럼 무심하게 알려주었다.) 아, 맞다, 복대시장. 매니저 형도 고향이 청주거든요. 저랑 같이 일한 지 6년 정도 됐는데, 운명인 것 같아요. 고향이 같다 보니 통하는 게 있어요. 청주의 정서, 공기, 냄새를 같이 향유한 사람이라 그런가.(웃음)
<은애하는 도적님아>가 방영 중이고, 영화 <파반느>도 공개를 앞두고 있어요. 요즘 문상민은 어떤 감정이에요? 엄청 고독해요. 오래 기다린 <파반느>가 마침내 공개되고, <은애하는 도적님아> 시청률도 좋게 나와 엄청 기쁘고 새로운 자극도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공허하더라고요. 집에서 본방 사수하는데,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묘한 기분이에요. 처음 느끼는 감정인데, 오히려 좋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내가 책임감을 느끼는구나. 이런 게 배우의 고독함인가?’ 이러면서.
보통은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아쉬울 때 느끼는 감정이잖아요. 사람들이 좋아해주는데도 왜 그렇게 느낄까요? 새롭게 찍고 있는 작품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맡은 역이 평범하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거든요. 이 작품을 촬영하면서 처연한 기분이 일상에도 스며든 것 같아요. 요즘 감정의 온도가 전반적으로….
차갑다? 완전 차가운 건 아니고, 조금 차갑다. 어제 회식이 있어서 잠깐 들렀는데, 즐겁게 노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만 동떨어져 있는 거예요. 평소의 저라면 같이 즐겁게 어울릴 텐데, 금방 혼자 있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신기했어요. 요즘 내 감정 상태가 이렇구나.
그런 자신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것 같네요. 완전요. 지금의 제가 싫지 않아요. 곧 공개될 <파반느>의 경록도 온도가 비슷하거든요. 지금 상태로 <파반느>를 보면 또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요.

심지가 단단한 사람이 좋아요. ‘나 잘났다’ 과시하지 않아도 고유한 에너지가 첫인상에서 딱 느껴지잖아요. 누군가를 제압하기 위한 강함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극 중 경록의 나이도 20대 중반이에요. 이종필 감독은 20대 중반을 “청춘의 한 정체기”라고 표현하더군요. 스물다섯의 문상민이 느끼기엔 어때요? 20대 중반은 오해하기 쉬운 나이인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제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왜요? 모든 걸 책임지고 이끌어야 하는 나이라고 오만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근데 저한테 그 정도를 바라는 사람은 없어요. 더 부딪쳐보고, 도전해보고, 실수해서 혼나기도 하고, 반성하고 다시 일어나도 되는 나이인데, 어느 순간 능숙하다고 착각한 거죠. 그래서 요즘은 본능에 맡기려 해요.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전념해야 할 시기죠. 고민은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타인이 원하는 것에 관해 판단하기가 어려워요. 아무래도 남한테 보여지는 직업이다 보니 사람들이 저에게 원하는 모습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제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 머리가 아파요.
이도 저도 아닌 순간, 누군가의 만족은커녕 내가 가진 매력마저 사라질 수 있죠. ‘당장의 결과가 모든 걸 판가름 짓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믿고 이끌어주는 회사가 있다. 처음 느낀 감정을 쭉 밀고 가자’라는 마음을 되새겨요.

문상민이 정의하는 ‘은애하다’의 다른 표현은? 끝까지 있어주는 거요. <은애하는 도적님아> 1화부터 16화까지 이열은 은조의 곁을 떠나지 않거든요. 한결같이 곁을 지킨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회사를 은애해요. 회사도 저를 은애하고요. 모든 걸 희생하고 양보하는 뜨거운 사랑만 대단한 게 아니라, 기복 없이 은은하게 대하는 것도 대단한 사랑이라 생각해요.
문상민은 어떤 사람을 좋아해요? 심지가 단단한 사람이 좋아요. ‘나 잘났다’ 과시하지 않아도 고유한 에너지가 첫인상에서 딱 느껴지잖아요. 누군가를 제압하기 위한 강함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첫인상 이야기가 나왔으니 물어볼게요. 이종필 감독이 쓴 <파반느> 시나리오의 첫인상은 어땠어요? ‘도대체 이 시나리오가 왜 나한테 온 거지?’ 싶었어요. 저를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정말 냉정하게 저보다 좋은 배우가 해야 할 작품이라 생각했거든요. 배우 인생 처음으로 보자마자 ‘무조건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변요한, 고아성, 문상민의 합이 좋아요. 독립 영화로 커리어를 시작해 국내 영화 메이저 시상식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베테랑 배우, 아역 배우 출신으로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보유한 여배우, 자칫 무거울 수 있는 라인업에 환기를 일으킬 신선한 얼굴. 문상민은 이종필 감독이 찾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을 거고요. 감독님이 이 영화를 위해 10년을 준비했대요. 첫 미팅 날, “원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20대의 나에게 이런 영향을 끼쳤고, 우리가 만들 영화 <파반느>는 이런 작품인데 너랑 함께하게 돼서 참 좋다” 라고 덤덤히 전달하는데 너무 벅찼어요. ‘비싸고 화려한 장치가 있어야 꼭 세련된 게 아니구나. 이건 뭘 더하지 않아도 세련된 작품으로 완성되겠구나’ 믿었죠. 너무 든든했고, 그 덕분에 자유로운 연기를 할 수 있었어요.
<파반느>, <은애하는 도적님아> 모두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고,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어요. 문상민은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어떤 편이에요? 평소 사랑뿐 아니라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에요. 그게 장점일 때도 있지만, 일상에서나 연기에서나 감정을 좀 더 드러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요.

신중한 사람이라 그런 거 아닐까요? 순간적 감정에 속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하는 거죠. 그럴 수도 있겠네요. ‘표현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타이밍을 놓치기도 하고요. 사람 마음 참 알기 어렵잖아요.(웃음)
이제 곧 설이네요. 이번 연휴엔 청주 가는 거 어때요? 아, 설! 이번에는 가려고요. 금방 올라오겠지만, 이틀이라도 머물러야죠. 하하. 용산역에서 혼자 사먹는 커피가 참 맛있어요. 커피를 사서 서둘러 플랫폼을 찾아가는 그 동선도 되게 설레고요. 엄청 유명한 스타는 아니지만, ‘나 문상민, 이렇게 군중이 가득한 거리 한복판에 있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군’ 이런 생각을 하면 괜히 더 짜릿하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