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쇼맨을 만드는 사람들
K-공연 예술의 성취와 도약. 그 중심에는 무대를 설계하고, 음악을 입히고, 서사를 완성하는 이들이 있다. ‘위대한 쇼맨’을 만드는 세 사람.

무대 위 한국, 세계 속 한국
한국 연극이 세계 무대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을 오랜 시간 지켜 봐왔다. 이전에는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을 한국적으로 해석해 해외에 진출시키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난해 국립극단에 부임 한 뒤 우리 작가가 쓴 창작극으로 승부를 걸고 싶었다. 올해는 <십이야>를 조선시대 배경으로 번안해 베이징에서 선보인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중국과의 문화 교류를 다시 시작하는 무대 이기도 하다. 유럽 예술가들이 오래전부터 아시아 전통에 주 목해온 것처럼, 우리는 더 이상 ‘영감의 원천’에만 머무르면 안 된다. 미학과 철학, 제작 방식까지 제안할 수 있는 동등한 파트너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현지 취향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창작진이 주도하는 무대를 꾸준히 늘려야 한다. 최근 토니상을 수상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처럼 창작진의 국제 협업은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100% 한국 창작진이 만든 작품이 세계 무대에 서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K-컬처’라고 부를 수 있다. 세계화를 위해서는 규모보다 태도가 중요하다. 작품 선정부터 투어, 현지화 전략까지 모든 과정에서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 답을 품은 작품만이 무대 밖에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보이지 않게 짠 무대, 배우가 드러나는 연출
내게 연출이란 ‘화양연화’ 같은 개념이다. 작품을 만들 때마다 창문이 하나씩 열리듯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모으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과정은 늘 특별하다. 최근 13년 만에 재연한 <헤다 가블러>에서는 연출 흔적을 최소화했다. 초연이 욕망에 초점을 맞췄다면, 재연은 권태와 공허를 기조로 한다. 지난 13년간 변모한 보편적 감수성 속에서 현실에 발 딛고 선 여성과 주변 인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무대를 설계했다. 중심에는 배우들의 앙상블이 있었고, 그 힘은 이혜영 배우와 오랜 시간 쌓아온 신뢰에서 나왔다. 나는 장치나 퍼포먼스의 과잉보다 인물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중시한다. 관객이 배우를, 배우가 인물을, 인물이 삶을 드러내도록 돕는 것. 그 과정을 보이지 않게 설계하는 것이 연출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동시에 실험에 대한 열망도 놓지 않는다. 국립극단의 대표로서는 완성도 높은 서사의 필요를 인정하지만, 창작자로서는 형식과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다. 그래서 ‘창작트랙 180°’를 운영하게 되었다.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각 한 명의 예술가가 180일 동안 연극 창작 과정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결과 발표의 압박 없이 예술적 질문을 탐구하도록 지원한다.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더 깊은 창작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대 밖에서는 인간의 마음과 잠재의식, 보이지 않는 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언젠가 이 주제들이 무대 위에서 형태를 갖게 된다면, 또 한 번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박정희
2001년 극단 ‘풍경’을 창단한 후 연출 활동을 시작했고, 첫 작품 〈하녀들〉을 통해 연극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후 〈이영녀〉, 그리고 2008년 서울연극제 연출상을 수상한 〈철로〉 등 예술성과 형식적 실험을 두루 갖춘 작품을 선보이며 ‘연극계의 대모’로 자리매김했다. 2024년에는 국립극단 최초의 여성 예술감독 및 단장으로 취임해 부임 후 첫 작품 〈헤다 가블러〉 재연을 통해 한국 창작극의 세계화를 본격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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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뮤지컬이라는 궤적
<명성황후>는 한국 대형 창작 뮤지컬의 시작이자, 해외시장으로 나아간 이정표였다.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결합한 장면은 해외 공연에서 신선한 반응을 얻었고, 현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물놀이 악기를 구입할 정도였다. 이 작품이 남긴 성과는 흥 행을 넘어, 이후 한국 창작 뮤지컬이 해외 진출을 꿈꾸게 한 출발점이었다. 그 경험은 2002년 런던 해머스미스 극장에서 영어로 제작한 공연을 올리며 한층 확장됐다. 4개월간 현지 언어로 연습하며 그들의 시스템과 운영 방식을 몸소 배웠고, 한국에 돌아와 좋은 점을 적극 도입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뮤지션들과의 인연은 <맘마미아> 같은 글로벌 라이선스 작품으로 이어졌고, 나의 활동 무대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이후 해외 무대에서 통할 작품의 조건을 고민했다. 소재는 한국적이되 주제는 보편적이어야 했다. 침략의 역사 속 사랑과 우정처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담아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전 세계가 아는 이야기를 한국적으로 재 해석해 역수출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웃는 남자>, <위대한 개츠비>, 작곡에 참여한 <도리안 그레이> 처럼 모두가 아는 서사를 한국 제작진이 완성도 높게 만들어내면, 그것 또한 세계에 통한다. 최근 <어쩌면 해피엔딩>이 토니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동양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은 상징적이다.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는 한국 배우의 길이 열린 셈이고, 시장 자체도 넓어질 것이다. 이제 ‘창작 뮤지컬’이라는 한정된 표현보다는 하나의 장르로 당당히 자리 잡은 ‘코리안 뮤지컬’이라 부를 때가 됐다. K-무비, K-팝, K-드라마 에 이어 무대 예술에서도 K-뮤지컬 시대가 열리고 있다.
무대 위에 쌓인 시간의 결
매 작품 ‘다시 찾고 싶은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조건을 고집하기보다 팀과 작품에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 우선이다. 공연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조력자와 오케스트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음악감독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약속이다. 20명이 모이는 연습에서 한 사람만 시간을 지키면, 그 한 사람을 위해 정시에 시작한다. 모두의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는 공연의 완성도와 직결된다. 오랜 시간 이런 원칙을 지키면서 무대를 바라보는 시선도 변했다. 30대 초반에 처음 마주한 <맘마미아>의 ‘Slipping Through My Fingers’는 당시엔 딸의 마음으로 들었지만, 지금은 엄마의 마음으로 보게 된다. 세월이 바꾼 시선은 무대 위 감정을 더 깊고 넓게 만들었다. 이 변화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배우, 음악, 관객이 함께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의 힘이다. 2019년 첫 단독 콘서트는 그 힘을 가장 선명하게 확인한 순간이었다. ‘무대 위 모든 소리가 주인공’이라는 취지로 오케스트라와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0년 넘게 앙상블만 하던 배우, 육아로 쉬던 배우, 이제 막 데뷔한 대학생에게 각각 솔로 무대를 선물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부른 노래가 객석을 울렸고, 그 울림은 내게도 깊이 돌아왔다. 올해는 네 번째 시즌을 맞은 <데스노트>를 준비 중이다. 오래 이어온 작품일지라도 새로운 배우들이 불어넣는 해석과 에너지가 매번 다른 무대를 만든다. 같은 악보라도 연주에 따라 색채가 달라지고, 그 변주 속에서 새로운 긴장과 설렘이 태어난다. 그것이 내가 여전히 이 일을 사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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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정
뮤지컬 〈명성황후〉, 〈레미제라블〉, 〈맘마미아〉등 대형 뮤지컬 무대에서 활약해온 한국 대표 음악감독. 1997년 〈명성황후〉 건반 세션으로 첫 무대에 오른 뒤 오케스트라 지휘와 음악 슈퍼바이저, 교수 활동까지 폭넓게 이어왔다. 작품의 서사와 배우의 호흡을 세밀하게 살려내는 연출 감각이 뛰어나 ‘배우들이 가장 신뢰하는 음악감독’으로 꼽힌다. 2019년에는 첫 단독 콘서트 〈ONLY〉를 열어 오케스트라와 배우들이 한 무대에 서는 자리를 마련했으며, 현재 10월 중순 개막하는 〈데스노트〉 공연을 준비 중이다.

계단 속에 숨긴 서사
건축 작업을 이어가던 중 SNS에 올린 내 작품을 본 사이먼 스톤이 연락을 했다. 기존 무대 디자이너가 아닌 건축가의 시선으로 해석한 무대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벚꽃동산〉은 한국 버전으로 새롭게 각색하는 작품이었고, 그는 흔한 무대 대신 새로운 시도를 원했다. 무대를 설계하면서도 나는 건축과 마찬가지로 ‘비례’와 ‘형태’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이번 작품의 삼각형 구조는 시각적 상징이자 극의 감정선을 담은 장치였다. 한쪽 계단은 지면과 이어져 인물들의 상승과 절정을, 반대쪽은 끊겨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하락을 표현했다. 관객이 의식적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형태가 주는 완결성과 합리성은 무의식 속에 이야기를 전달한다. 협업 과정도 인상 깊었다. 감독, 음향·조명팀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였고, 기술적인 제약도 창의적 해법으로 풀어냈다. 예를 들어 1분 안에 대형 침대를 무대 밖으로 빼야 하는 장면을 위해 접이식 퀸 사이즈 침대와 분해 가능한 프레임을 직접 설계했다. 앞으로 다시 무대를 맡게 된다면, 회전 무대나 가변식 구조처럼 변형 가능한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다. 고정된 무대보다 변형하는 공간이 배우의 연기와 동선을 더 입체적으로 만들고, 나의 추상적 건축 미학과도 잘 맞기 때문이다. 무대 디자인은 형태와 구조 속에 숨은 이야기를 찾고, 그 안에서 관객이 각자의 해석을 찾아가게 하는 작업이라고 느낀다.
번역 없이도 전해진 장면
해외에서 자란 경험과 건축가로서 활동은 디자인적 관점을 넓혀주었다. 그 덕에 한국 연극 무대를 맡을 때도, 단일한 문화나 언어권에 갇히지 않게 하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본질적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는 디자인’을 지향한다. 재료나 장소성을 구체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닌, 추상적이고 미니멀한 시각언어를 사용하면 세계 어느 관객이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공감할 수 있다. 그 언어는 누구에게나 열린 가능성이자, 각 문화권이 스스로 이야기를 덧입힐 수 있는 여백이 된다. 이번 〈벚꽃 동산〉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대의 핵심 구조는 특정한 시공간에 고정되지 않은 ‘보이드(void)’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하얀 공간 속에 갑작스럽게 솟아난 집, 그 주변을 잇는 계단과 지붕이 인물의 관계와 서사를 담아낸다. 이러한 설계 방식은 관객이 무대를 한정된 장소로 인식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보편적 감정과 상징성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물론 언어와 문화적 뉘앙스가 100% 전달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벚꽃동산〉처럼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은 기본 스토리 구조가 공유된다. 각국의 관객은 장면마다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오히려 무대 위에 남겨진 고유한 언어와 표현이 작품의 개성을 강화한다. 예를 들어 이번 공연에서는 배우가 한국어 욕설을 적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는 현지 관객에게 번역되지 않아도 직관적 시각 효과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디테일이 작품의 독창성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세계 무대에서 한국 공연 예술이 더 빛나기 위해서는 ‘한국다움’을 과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전통을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건축과 무대 디자인 모두 추상적이고 미니멀한 조형 언어 속에 본질적 아이디어를 담아낼 때, 국경과 언어를 넘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울 킴
서울과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 디자이너. 건축과 예술, 무대를 넘나드는 작업을 통해 ‘Architecture Anomaly’라는 독창적 디자인 언어를 구축해왔다. 2024년 연극 〈벚꽃 동산〉에서 무대 디자인을 맡으며 연극 무대에 첫 도전했다. 유명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직접 협업을 제안해 성사된 작품으로, 그는 벽·바닥·계단 같은 익숙한 건축 요소를 낯설게 재배치해 관객의 시선을 새롭게 이끌었다. 〈벚꽃 동산〉은 홍콩, 싱가포르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해외 투어에 돌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