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세의 순간
경건한 마음으로 임하는 모든 순간에 대하여.
저도 <악귀> 애청자예요. 반갑습니다.
(웃음) 감사합니다.
정말 재밌는데, 그만큼 무서워서 드라마 본 날엔 화장실도 못 가겠더라고요. 괜히 거울과 문지방 한 번씩 보고. 직접 연기한 배우도 그런지 궁금했어요.
열심히 했죠. 특히 과거 신은 글로만 보고 현장에서 영상으로 처음 접하는 거니까, 시청자 입장에서 신선한 느낌이었어요.
촬영할 때와 편집된 작품을 볼 때 느낌은 또 다르죠. 오늘 화보 촬영 때는 마치 작품 촬영 현장에 있는 듯했어요. 화보 촬영도 즐기는 편이죠?
즐기진 못하는데, 찍다 보니 노하우가 생기는 것 같아요. 오늘은 콘셉트 안에서 잘 놀아보려 했어요.(웃음)
<악귀> 반응이 좋았어요.
감사하게도 많이 사랑해 주셨어요. 만드는 입장에서는 시청자들이 흐름을 놓치지 않을지, 재미있어 할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덕분에 감사한 마음으로 시청했죠.
우려했던 이유가 다소 생소할 수 있는 한국형 오컬트 장르여서일까요?
쉽게 내용을 전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나 인물을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하는 미스터리 장르니까요. 너무 쉬우면 아쉬울 것 같고, 어려우면 단점일 것 같았어요. 그런 지점을 항상 고민하면서 ‘여기선 쉽게 표현해야 하나?’, ‘이런 건 나중에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하나?’ 계속 생각했어요.
고민 끝에 어떤 지점을 택했는지.
매번 조금씩 달랐어요. 어떤 신에서는 내가 느낀 극 중 캐릭터 ‘염해상’의 마음을 담아 쉽게 표현했고, 또 어떤 신에서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작품의 방향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에 절제하기도 했죠.
민속학 교수 염해상은 평범한 캐릭터가 아니에요. 어릴 적부터 악귀를 보기도 했고요. 인물에 분하기 위해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나요?
민속학이라는 학문에 깊이를 더하기보다는 해상의 정서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많이 할애했어요. 어떤 마음으로 악귀를 쫓아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악귀를 없애러 가는 여정 중에 만나는 사건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어떤지 고민했죠.
그렇게 느낀 염해상의 정서는 어떤가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나온 아픈 기억이나 억울하게 죽은 이를 생각할 때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죠. 하지만 해상은 그보다 더 짙고 깊은 마음을 갖고 있어요. 특정 인물이 곧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생명의 소중함과 고통에 대해 느끼는 무게가 큰 인물. 그래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본능적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못 구하면 아파하기도 하죠.
악귀를 보게 됐지만 그걸 통해 오히려 사람을 살리게 된 심오한 인물이네요. <지리산> 이후 김은희 작가와 재회한 소감도 묻고 싶어요.
감사하죠. 작품을 함께한 뒤 보통 다시 만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그래서 더 최선을 다했어요.
시나리오를 보고 떠오른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감독님과 공유하고 적용하는 편이라고 알고 있어요. <악귀>에도 본인의 영감을 반영한 부분이 있나요?
큰 서사는 작가님이 탄탄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한 신 한 신 또는 한마디 한 마디 정도만 덧칠했어요. 한 예로, 해상을 모든 사건을 해결하는 히어로가 아닌 일반 사람처럼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2화 촬영 때 집 안에 갇힌 아이를 구한 뒤 얼음찜질하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죠. 사람 냄새 나는 캐릭터였으면 했어요. 달리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거나 힘이 무지 세지는 않은.
또 그런 장면이 있을까요? 시청자로서 비하인드를 들으니 재밌네요.
아이를 구하고 절에 가는 신이요. 사건 이후 정성을 드리는 해상의 모습을 통해 한 명 한 명을 살리고자 하는 그의 염원이 관객에게 조금 더 보였으면 했어요.
장르가 장르인 만큼 촬영 현장도 공포스러운 분위기였을 텐데, 고충은 없었나요?
귀신은 괜찮은데, 벌레는 좀 겁나요. 으스스한 공간에서 분명 오싹한데, 실질적으로 연기하는 데는 저런 애들(촬영장 한편에 있던 큰 벌레를 가리키며)이 더 무서워요. 폐가에서 물건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들추면 그 밑에 벌레들이 있어요. 그땐 저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거죠.
염해상이 차에서 매일 듣는 음악도 인상 깊었어요. 진도씻김굿이었죠.
처음 들을 땐 시끄럽고 적응이 안 됐는데, 해상을 만나면서 듣다 보니 또 편해졌어요.
일상적 음악은 아니니까요. 실제 음악 취향은 어떤가요?
취향이 딱 정해져 있진 않아요. 광범위하게 듣는데, 숨은 인디 가수 노래도 좋아해요. 우연히 들은 노래를 좇아, 가수를 좇아 파도를 타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돼요. 최근에는 허회경이란 가수가 좋아서 많이 들었어요. 그중 ‘그렇게 살아가는 것’. 매번 그렇진 않은데 작품을 하다 보면 나만의 OST가 있어요. 개인적으로 해상은 이 노래를 OST로 생각했어요.
어떤 점에서 해상의 OST가 됐는지.
가사를 들을 때 위로받는 느낌. 악귀를 쫓아가는 스릴러물이지만 작가님이 생명의 고귀함, 청춘에 대한 곱씹음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이런 노래를 들으면 작품과 맞닿은 어떤 지점이 있어요. 촬영이 끝났을 때는 김일두의 ‘나는 나를’을 들었어요. 해상이가 해상이한테 해주는 말 같아서. ‘나는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해, 나는 지금까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 같아’라는 내용의 가사예요.
캐릭터를 연기하는 하나의 역할뿐 아니라 실제 인물처럼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해상을 만나면서 저도 성장한 것 같아요. 안타까운 사고나 재난을 보면 그냥 안됐다는 정도의 마음을 가진 일반 사람이었는데, 해상을 만난 이후로는 그런 사건・사고가 더무겁게 다가와요. 기회가 되면 추모를 드리러 가기도 하고 발걸음을 늘렸어요.
<악귀>는 오컬트 장르라는 탈을 쓴 추리물이면서 결국은 사람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라고 생각했어요. 계속 말씀하신 것처럼 작품 속 염해상은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고, 약자를 구하는 현명한 어른이고요. 본인이 생각하는 현명한 어른은 어떤 모습인가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매 순간 그리고 각자 위치에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면 어른이 아닐까요. 작가님도 가장 큰 악귀는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이라고 표현했거든요. 모든 사람이 나쁜 욕망과 싸움을 하는데, 거기서 이기는 사람이 조금은 어른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요.
촬영 콘셉트 때문에 흡연을 부탁드렸는데, 금연 중이라고 들었어요.
잘 안 피워요. 끊거나 절제하는 게 아니라 정말 간절할 때 피우죠.
이미 어른인데요.
(웃음) 금연에서는.
지난 5월에는 공개를 앞둔 영화 <거미집>으로 칸 국제영화제를 방문했죠. 배우로서 남다른 의미였을 텐데, 처음 접한 칸은 어땠나요?
배우가 좋은 작품을 만나는 것도 영광인데, 그게 누군가의 눈에 좋은 평가를 받고 사랑받는 건 감사한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칸 국제영화제에 출품한 작품을 만나고 영화제에도 참석한 건 제게 큰 의미가 있었어요. 함께한 멤버들이 모두 편해서 큰 부담 없이 소풍 가듯 즐기다 왔어요.
기억에 남은 순간이 있나요?
일정상 다른 작품은 못 보고 <거미집>만 볼 수 있었어요. 뤼미에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관객들은 기립 박수를 치며 우리 영화를 사랑해주는 마음을 느꼈을 때 벅찬 기분이었죠. 큰 영화제임에도 전혀 권위적이지 않고 파티 같은 느낌이었어요. 분위기도 인상적이었고요.
바쁜 일정이었겠지만, 남프랑스 칸을 조금이라도 즐길 시간이 있었나요?
영화제만 참석하고 바로 돌아와서 아쉬웠어요. ‘10년 안에 다시 한번 와야지’ 생각했죠.
단편영화 <몸값>을 보고 이충현 감독에게 반해 그의 작품은 뭐든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결국 영화 <콜>에 출연했어요. 이렇게 단 한 신이더라도 함께하고 싶다고 느낀 작품이 최근에도 있었나요?
요즘은 작품보다 위트 있는 광고를 찍는 분들이 눈에 띄어요. 핫초코 미떼 광고라든지, 성동일 선배가 했던 KCC창호 광고라든지. 할머니들이 나오는 알바몬 광고처럼 색다른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광고가 있잖아요. 저런 분들이 작품을 하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그러다 보면 참여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요.
일상 곳곳에서 영감을 얻는 것 같아요.
뭔가 새로운 느낌을 받으면 저장해두는 편이에요.
많은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예요. 개인적으로는 <동백꽃 필 무렵>의 얄밉지만 밉지만은 않은 노규태, <극한직업>에서 쫀쫀한 멘트가 인상적이던 테드창이 기억에 남는데요. 연기했던 캐릭터 중 가장 애틋한 인물이 있다면.
딱 한 명만 고르기는 어려운데. <동백꽃 필 무렵>은 제게 선물 같은 작품이고, 노규태는 사랑하는 인물이에요. 제 작품을 잘 못 보는 편인데도 즐기면서 봤죠.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문상태도 저한테 많은 걸 얻게 해줬고요. 배우의 길을 걸으면서 가장큰 도전이었고, 스스로 느끼기에 결과물도 나쁘지 않았던 게 <남자 사용설명서>의 이승재예요. 모두 저한테 의미 있는 작품이고 캐릭터였죠.
맞아요. 특히 <남자사용설명서> 이후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죠.
스코어가 높진 않았지만 단역, 조연만 하던 제게 주인공 역할을 준 작품이에요. 당시 역할 자체가 톱스타라 제게 큰 숙제이자 넘어야 할 산이었는데, 감사히 그 산을 넘지 않았나 싶어요.
오정세라는 배우는 마치 도화지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매번 새로운 인물로 변모하는 자신만의 요령이 있나요?
요령은 없어요. 그 친구는 어떤 인물일까, 그 친구에게 어떻게 가까이 갈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는 거죠. 준비를 열심히 해도 초반에는 저도 이 친구를 만나는 과정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어느 순간 일찍 만나는 친구도 있고 조금 늦게 만나는 친구도 있어요. 그렇게 상대 배우와 감독, 현장의 공기를 먹고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악귀>와 <거미집>, 각 작품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거미집>은 국가대표 감독이 국가대표 배우들을 모아놓고 “너네 한번 놀아봐” 라고 말한 뒤 그 안에서 각자 신나게 캐릭터 플레이를 한 작품이에요. 즐겁고 배울 것도 많았죠. 특히 송강호 선배님에게는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어요. 선배님이 뛰어가는 신이 있는 데, 그걸 저와 배우들이 쳐다보는 장면이었거든요. 그냥 시선만 촬영해도 되는 거였는데, 실제로 앞에서 계속 뛰어주시더라고요. 상대 배우의 시선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는 선배님, 배우와 어떻게 소통하고 놀 수 있을지 고민하며 장을 펼쳐주는 김지운 감독님 등. 일련의 과정에서 많이 배운 영화예요. <악귀>는 해상이 악귀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작은 성장이 있었는데, 그 친구를 만나면서 저 또한 성장할 수 있었던 작품이죠. 스쳐 지나가는 대사 중 중심을 잡아준 게 있는데요. 대략 “이곳은 안 좋은 귀신 때문에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싫으면 경건한 마음이라도 가지세요”였어요. 해상은 이거 해야 해, 저거 해야 해 강요하진 않지만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죠. 비단 제사뿐 아니라 모든 일에 해당하는 것 같아요.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 이 작품과 해상을 만나면서 생각했어요.
참여한 작품 속에서 배우고 성장한다고 했어요. 2023년의 오정세는 어떤 모습인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나요?
감사한 한 해. 그리고 당연하다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가짐. 훌륭한 작품을 만나 좋은 평가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는 거지, 내가 열심히 하고 잘해서 긍정적 반응을 얻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운이 좋아서, 주변 사람과 함께라서 가능한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