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묘한 지현
<얼굴>, 그리고 한지현이라는 재발견.

〈얼굴〉 이후의 한지현을 발견하며
한지현은 살짝 피곤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관객들에게 조금은 각인이 되었을까요?”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얼굴>은 그에게 배우로서 변곡점에 서게 해준 작품이다. 3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한 이 작품은 ‘기적’이라 불릴 만했다. 토론토 국제영화제 상영과 무대 인사, 드라마, 차기 영화까지 그의 스케줄표에는 여백이 거의 없어 보였다. “요즘은 이동하는 차 안에서 쪽잠을 자요. 쉬는 날엔 10~12시간 푹 자는 편인데, 바쁠 땐 짧게 자는 수밖에 없어요.”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을 잇다가도 작품 이야기가 시작되면 눈빛이 반짝였다.
한지현은 작중 다큐멘터리 PD ‘김수진’을 연기했다. 실종된 여인 ‘정영희’의 흔적을 따라가며, 세상이 ‘얼굴’이라는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얼마나 쉽게 판단하는지를 묻는 인물이다. “대본을 처음 읽고 든 생각은 ‘그녀가 얼마나 못생겼길래’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누군가의 가치를 외모로 판단해왔나’였어요.” <얼굴>은 사건의 추적보다는 인간 내면에 숨어 있던 편견과 폭력의 층위를 따라간다. “선배들 대사에도 그런 게 있어요. ‘아름다움과 추함, 그 경계가 너무 과한 세상’이라는 말. 연상호 감독님은 그 주제를 사회적으로 잘 비틀어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오른쪽_ 러플 디테일의 벨벳 드레스와 골드 참 네크리스 모두 Burberry.
처음에는 냉정한 관찰자 같던 수진은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흔들리고, 그 감정의 떨림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결국 관객이 수진의 눈을 빌려 같은 길을 걷게 돼요.” 한지현은 그 미묘한 진폭을 ‘억제’로 표현했다. “영화는 숨소리 하나까지 다 들리잖아요. 그래서 감정을 다 드러내기보다 남겨두는 걸 택했어요. 울컥하는 장면에서도 울지 않았죠.” ‘백주상’의 집에서 정영희의 사진을 마주한 순간, 그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고 했다. “분노, 억울함, 허탈한 감정이 동시에 밀려 오더군요. 딱 하나로 표현이 안 됐어요.” 장례식 장면에서 외친 대사 ‘닮았네요’는 그래서 마음에 더 오래 남았다. “마치 수진의 감정이 제 안을 통과해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았어요.”
한지현은 이번 작품을 ‘배우로서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된 영화’라고 했다. “<서복>부터 <계시록>까지 영화의 문을 꾸준히 두드렸어요. 하지만 <얼굴>은 가장 성장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죠.” 연상호 감독의 촬영 방식에 대해서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감독님은 정말 빨라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그런데 완성본을 보면 납득이 돼요. 구도랑 리듬이 정확하거든요.” 그는 이번 현장을 통해 “체력은 여유로웠지만, 대신 생각의 밀도가 깊어졌다”고 말했다.
지나온 한지현을 들여다보다
<얼굴>을 지나온 그는 전보다 성숙해졌지만, 동시에 전에 없이 담백했다. “예쁘게 보이려는 마음은 진작에 없었어요. 다큐멘터리처럼, 실제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연기만 잘하자, 누가 되지 말자’ 그 마음뿐이었어요.” 멀찍이 그의 커리어를 보면, 이번 선택은 돌출된 커브라기보다 정교한 확장이었다. <펜트하우스> 시리즈에서 ‘주석경’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긴 뒤, 그는 <치얼업>의 ‘도해이’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냉철함이 아닌, 불안과 성장의 얼굴이었다. “해이는 늘 불안하지만 멈추지 않아요. 저도 그 작품에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버티는 얼굴’이 누군가에겐 힘이 될 수 있구나, 처음 실감했죠.”
한지현은 본인 또한 여전히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성장 중인 청춘이라고 말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잘 안 되는 날이 훨씬 많아요. 그래도 그날의 감정이 다음 장면을 만들어줘요. 완벽하지 않아도, 그 순간이 다음을 위한 연습이 되더라고요.” 한지현은 그렇게 오늘도 자신만의 속도로 배우의 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얼굴>에서 배운 생각을 잊지 않으려 해요. 진심이 더 멀리 전해지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 그의 연기적 밑바탕은 오래전부터 ‘몸’을 통해 길러졌다. “중2 때 키가 168cm쯤 됐어요. 175cm는 돼야 런웨이에 선다고 해서 열심히 기다렸죠. 키는 더 안 컸지만, 좋은 경험이었어요.” 모델 학원에 다니던 시절, 잠깐 배운 승마도 그에게는 중요한 감각이었다. “말과 교감할 때 느끼는 몰입감이 좋아요.” 그는 웃으며 팔을 쓸어내렸다. “올해 취미로 타다가 팔이 부러졌어요. 수술을 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섰지만, 다행히 하지 않고 잘 굳어서 완치되었어요.”
그렇게 사고 이후 그는 지금의 단정하고 느긋한 일상을 즐기게 됐다. “혼자 있는 시간도 좋아요. 촬영장에선 늘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니 집에선 청소하고, 식물에 물 주고, 팩 붙이고 누워 유튜브나 애니메이션을 봐요.” 요즘에는 그중 소년물을 즐긴다. “다 같이 힘을 내는 이야기를 보면 희한하게 마음이 편해져요.” 최근에는 관객과 무대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 “얼마 전 (이)상이 선배님의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보고 ‘언젠가 저렇게 관객과 호흡하며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대 앞에서 떨리는 그 순간을 극복할 수 있다면 또 한 단계 성장하지 않을까 싶어요.”

팬데믹 시기에 데뷔해 관객을 직접 만날 기회가 적었던 그는 이번 <얼굴>을 통해 처음 무대 인사를 경험했다.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이 일을 계속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 시간만큼은 관객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으면 좋겠어요. 잠깐이나마 현실과는 다른 온도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최근 그는 영화 <메이드 인 이태원>과 드라마 <찬란한 너의 계절에> 캐스팅 소식을 알렸다. “<얼굴>에서 배운 생각을 잊지 않으려 해요. 진심이 더 멀리 전해지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작품이 끝나면 늘 후회가 남지만, 그 역시 배우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후회를 엄청 많이 해요. ‘저기서 조금만 더 저렇게 할걸’ 같은. 그래도 그때 최선을 다했다는 건 인정하죠. 그래서 다음에 바꿔보자고 다짐해요.” “학교 때 배운 것 중 가장 기억나는 게 ‘인식’이에요. 내가 부족한 걸 알아야 고칠 수 있잖아요. 인식을 못 하면 변할 수 없어요. 지금은 그걸 계속 연습 중이에요.”
한지현은 여전히 지금을 ‘배우가 되어가는 과정’이라 표현했다. “(연기를)할수록 어렵지만, 그만큼 더 좋아져요. 그냥 이게 제 길 같아요. 아직 끝까지 가보지도 않은 그 길요.” 눈빛이 반짝였다. 책임감과 천진함, 성숙함이 한데 겹쳐지는 얼굴이었다. 복합적인 결이 지금의 한지현을 설명해주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인터뷰 제목이 찬찬히 떠올랐다.
연기는 할수록 어렵지만, 그만큼 더 좋아져요. 그냥 이게 제 길 같아요. 아직 끝까지 가보지도 않은 그 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