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와 베로니크 니샤니앙의 아름다운 작별
37년간 쌓아 올린 우아함의 기록.
CONTINUUM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바뀔 때마다 브랜드의 색과 방향성이 백팔십도 달라지고, 몇 계절 전의 옷은 금세 잊히는 얕고도 소란스러운 시대다. 매 순간 새로움을 갈망하는 패션 세계에서 1988년부터 2026년까지 무려 37년간 에르메스 남성복을 이끌어온 베로니크 니샤니앙(Véronique Nichanian)의 시간은 그래서 더욱 각별하다. 한 브랜드와 한 사람이 오랜 신뢰와 의리를 다지며 함께 걸어온 시간. 그 위에 쌓아 올린 무수한 실험과 시도는 유행을 넘어 에르메스 남성복만의 고유한 가치와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니샤니앙은 늘 스스로 패션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닌 옷을 만드는 사람이라 표현했다. 그가 만든 옷은 특정한 유행이나 인물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각기 다른 체형과 직업, 취향과 삶의 반경을 지닌 남자들이 저마다 방식으로 입고 살아가는 옷이자 오래 곁에 두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는 동반자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에르메스의 남성복은 유행의 조급함이 없다. 말쑥한 체형부터 듬직한 체형까지 두루 품을 수 있는 마법 같은 실루엣, 서로 다른 취향을 한데 모으는 압도적 소재의 힘은 ‘좋은 옷’의 기준을 새롭게 정립했다. 무엇보다 실제 입는 이의 충성도를 더욱 드높이는 지점은 지난 계절의 것과 새로운 계절의 것을 뒤섞어 즐기는 데 어색함이 없다는 것이다. 미색과 회갈색처럼 정제되고 차분한 채도를 중심으로 파스텔 톤과 비비드 컬러 포인트, 블랙 같은 모노톤의 경계를 우아하게 연결하는 고유한 색채는 시간의 경계를 우아하고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에르메스의 옷은 입었을 때 진가가 드러난다. 손끝에 닿는 카프스킨의 매끈함이나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캐시미어의 보드라운 감촉,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옷을 여미는 지퍼의 움직임 등은 남자의 몸과 태도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보여주기 위한 사치라기보다 입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가장 사적인 호사에 가깝다.
니샤니앙의 옷은 단순한 명품 소비가 아닌 좋은 물건을 탐닉하던 남자의 심미안을 깨우고, 취향을 채우며, 파리의 아틀리에와 런웨이를 넘어 세계 곳곳의 도시와 서울의 거리와 삶에 자리했다. 아침의 분주한 발걸음과 고요한 사색의 순간까지. 에르메스의 옷은 남자의 삶을 장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과 움직임을 묵묵하게 지지한다.
2026 F/W 컬렉션은 니샤니앙의 37년 여정에 마침표로 기록되지만, 결코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겹겹이 축적한 세계관을 실재하는 물성으로 경험한 기억은 쉽게 바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경계 없이 교차시키는 에르메스의 방식처럼, 그녀가 남긴 유산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줄 것이다. 동시에 니샤니앙의 옷을 입은 남성 역시 자신의 삶을 계속 이어나가며 옷에 깃든 시간과 온기를 기억할 것이다.







테크니컬 개버딘 소재의 블루종과 코튼 포플린 소재의 셔츠, 브레이디드 울 소재의 팬츠, 팔라듐 소재의 열쇠 모티브 그랑 호텔 포부르 팔찌, 카프스킨 소재의 뉴튼 로퍼 모두 Hermè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