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현이라는 신비로움
안보현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엔 단단한 근육이 배어 있었다. 스톤 아일랜드라는 혼돈 속 에너지를 뿜어내는 모노크롬처럼.
SBS 드라마 <재벌×형사>가 한창 방영 중인데,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오랜만에 고향인 부산에 다녀왔고, 사람들도 만나면서 시간을 보냈다. 휴식기지만 방영 기간이라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지내고 있다.
매주 금·토요일 본방 사수하고 있나?
1회와 2회 때는 극장을 빌려 출연진이 단체 관람을 했다. 그때는 내 연기를 보는 게 어색해서 눈을 좀 피했던 것 같다.(웃음) 요즘은 본방을 챙겨 보면서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다. 감사하게도 애드리브 신을 다 써주셨더라.
애드리브가 많았나?
쥐가 나왔다고 난리를 치는 장면도, 대사 “나이스 웨더”도 다 애드리브였다. 그리고 경감 명패를 2개 만들어 자랑하는 장면도. 그 장면이 좀 심심해 보여 촬영을 다른 날로 미루고 명패 제작을 부탁했다. 그걸로 철없는 ‘진이수’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즐겁게 촬영했던 기억이 있다.
장면을 살린 거군.
현장 분위기나 배우, 감독, 스태프의 관계가 정말 좋았다. 그래서 나도 서슴없이 의견을 내고, 시도할 수 있었다.
원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편인가?
사실 조심스러워서 선뜻 의견을 내지는 못한다. 그런데 감독님과 작가님의 기대치도 있고, 현장에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준 덕에 신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인터뷰일 기준) 지금 4화까지 방영했는데, 앞으로도 웃긴 장면이 쏟아질 거다.
감독님이 안보현에게 기대한 건 뭔가?
작가님과 감독님이 기분 좋으라고 한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첫 만남에서 “너밖에 안 떠올랐다”라고 하시더라. 작가님은 <마이 네임> 때 같이 했기 때문에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수가 워낙 방방 뛰는 캐릭터라, 그 부분을 소화해낼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한 것 같다. 기대도,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 염려를 덜어준 것 같나?
다행히 첫 방송을 보고 작가님이 이수 캐릭터를 잘 살려줘서 좋았다고 극찬을 해주셨다. 그걸 안보현이 해낼 줄 몰랐다고. 그럴 때 배우로서 뿌듯하다.
<모범택시>의 이제훈, <천원짜리 변호사>의 남궁민을 잇는 히어로 라인업이라는 말도 있더라.
그간 안보현이 보여주지 않았던 유쾌하고 귀여운 구석이 많은 모습이긴 하다. 이수는 결국 내가 연기해야 하는 인물이기에 잣대를 나한테 댈 수밖에 없다. 내 안에서 이수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 거다. 그래서 내 텐션의 최고치는 어디일까 고민을 많이 했다. 이수 외에는 다들 차분한 캐릭터라 상대적으로 과해 보이진 않을까, 작품에 누가 되지 않을까 등 많은 생각이 들더라.
평소에 가장 텐션이 좋을 때는 언제인가?
아무래도 술 한잔 마셨을 때가 아닐까. 그런데 이수 같은 텐션은 아니다.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 옛날 노래 부르며 놀 때는 이수 같은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액션 신도 꽤 있는데 <마이 네임>과는 또 달랐을 것 같다.
이수는 다 척척 해낼 것 같지만, 빈틈이 많고 허당기 있는 친구다. 그래서 액션도 여태껏 했던 것과 다르게 디자인했다. 이수의 액션은 조금 허술하고 귀여워 보이는 포인트를 살리려고 했다. 멋있는 호흡 소리보다 ‘빠세’ 같은 기합을 넣기도 하고.
실제로 본인이 형사인데, 철없는 재벌 3세가 낙하산으로 들어오면 어떨 것 같나?
나라면 반대로 잘 활용했을 것 같다. 내 편으로 만들어 잘 구슬린 뒤 수사에 도움이 되게끔 했을 것 같다. 이수 같은 친구가 있으면 편하지 않을까.
어떤 점에 이끌려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
전작이 로맨스물인 <이번 생도 잘 부탁해>였는데, 이번엔 텐션을 올려보고 싶었다. 전작과 대비되는 캐릭터에 관심이 간다. 그래서 <이태원 클라쓰> 이후 <카이로스>를 선택한 거고. <유미의 세포들>에서 공대생 구웅을 연기했는데, 외적으로나 캐릭터적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었다.
매번 낙차가 큰 캐릭터를 소화하는 게 부담이 될 법도 한데.
두렵긴 하다. 그래서 방송되는 이 시점에도 늘 긴장 상태다. 그런데 이게 정답은 없으니까.
긴장하는 이유는 뭔가? 시청자의 반응 때문에?
장면을 살리기 위해 고민해서 연기한 지점이 시청자의 공감을 끌어냈는지, 의도한 것을 사람들이 캐치했는지, 뭐 이런 게 궁금하다. 아마 배우를 하는 동안 내 연기를 보고 만족할 일은 없을 거다. 볼 때마다 아쉽겠지. 당장 어제 찍은 것도 아쉽다. 그렇다고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후회하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재벌×형사>를 본 지인들은 뭐라고 하던가?
“네 옷 같다”는 말을 많이 해주더라. 재벌로 살아본 적도 없는데.(웃음)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다는 생각도 들고. 젊을 때 더 많이 도전하고,
내가 뭘 잘하는지 찾아볼 생각이다.
3년 전 인터뷰에서 “배우로 자리매김하는 해가 되길 바란다”고 했더라. 어느 정도 기반을 다졌다고 생각하나?
사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아직까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이전보다 선택의 폭이 조금 넓어지긴 했지만, 그 위치에서 겪는 또 다른 고충과 책임감의 무게가 있더라.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들고. 매 순간 행복하게 일해야 하는데, 생각이 많아 괴로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고민도 기회가 주어졌으니 가능한 거라 생각하면 감사하다. 3년 전만 해도 기회가 많지 않아 무조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자고 결심했는데 지금은 나를 믿고 봐주는 분들, 귀한 시간대에 편성된 덕에 봐주는 분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분들을 위해 더 노력하고, 진지하게 임하려 한다.
변화에 대한 고민은 배우의 숙명인가 보다.
그렇다고 거기에 얽매이는 건 아니다. 그 또한 내가 즐기면서 일하기 위한 선택이다. 평생 다양한 직업군을 경험해본다는 건 쉽지 않다. 배우이기에 가능하니, 얼마나 행운인가.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다는 생각도 들고. 젊을 때 더 많이 도전하고, 내가 뭘 잘하는지 찾아볼 생각이다.
안보현은 목소리에 색깔이 있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아, 그런가? 사실 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친구들이 가끔 이야기한다.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손님이 많은 밥집에 가면 친구들이 “네 목소리만 들어도 다 들통나”라고 하더라. 한번은 KTX를 탔는데, 뒷좌석에 앉은 분이 내 목소리만 듣고 사인을 받으러 오셨다. 정말 신기했다.
캐릭터 있는 목소리도 배우의 능력이다.
내 목소리가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뭐랄까, 남성미가 살짝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중저음의 굵은 목소리를 가진 배우들이 되게 부럽다.
그렇다면 본인이 배우로서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은 뭐라고 생각하나? 시청자들이 작품을 보고 나를 못 알아보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 변신의 여지가 많은 얼굴인 것 같긴 하다. 어릴 때는 “매섭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싫었다. 그런데 또 순하게 봐주는 사람도 있더라. 선과 악, 양면성 있는 얼굴이야말로 배우에게는 장점이 아닐까.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한 걸 보면 고생도 꽤 했더라. 그 시간이 배우 인생에 영향을 주기도 하나?
이젠 많은 사람이 알 텐데, 어릴 때 복싱을 했다. 팀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홀로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운동이었기에 항상 스스로 채찍질해야 했고, 외롭기도 했다. 지금 아무리 체력적으로 지쳐도 그때보다 힘들진 않을 거다. 힘들다면 그건 핑계다. 체육 특기생을 택한 것도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서였다. 의식주가 다 해결되니까. 한때 월세 등 생활비에 허덕이며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아니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원하는 거 마음대로 사면서 돈을 쓰고 싶을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배부른 소리다 싶다. 좋은 자양분이 된 것 같다.
이제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여유가 생기지 않았나?
정말 쉬지 않고 일했다. 배우 일을 시작하고 지금이 가장 긴 휴가다. 난 죽도록 열심히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남보다 몇십 배는 더 노력해야 목표치 근처에라도 닿을 수 있을 테니.
오늘도 복싱을 언급했는데, 인터뷰에서 복싱 이야기가 빠지지 않더라.
어떤 기대치가 있는 것 같아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나를 만나면 팔뚝부터 만진다든가.(웃음) 나를 거의 태릉선수촌에서 나온 연예인처럼 생각하는 분도 있다. 오히려 그런 이미지 때문에 더 관리하는 것도 있다.
취미 부자던데, 새롭게 빠진 게 있나?
전혀 없다. 예전에는 잠깐의 여유만 생겨도 바이크를 타고 낚시나 캠핑을 하러 다녔다. 요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쉬는 편이다. 이번 명절에도 집 앞 바다로 낚시하러 갔다가 추워서 그냥 돌아왔다.(웃음) 예전엔 추위에 끄떡도 안 했는데.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언제인가?
할 거 다 끝내고 대본, 넷플릭스, 뭐든 보면서 간단하게 소주 한잔 마시는 거. 가장 나다워지는 시간이다.
혼술을 즐기나?
그렇다. 술을 좋아하지만, 많이 마시진 않는다.
부산에 다녀왔다고 했는데, 무얼 했나?
명절이라 7시간 반 동안 운전하고 내려갔는데, 부산에서도 거의 택시 기사처럼 매일 운전대를 잡았다.(웃음) 가족들 태우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이모들이 사는 다대포에 어머니를 모셔다드리고, 장도 보러 가고. 할머니가 거동이 힘드셔서 평소 많이 돌아다니지 못하는데, 내려간 김에 드라이브도 시켜드렸다.
효자구나.
그렇진 않다. 벼락치기로 아들 노릇을 하고 온 거다.
오른쪽 _ 화이트 고스트 보머 재킷과 루스 핏 카고 팬츠, 손에 쥔 크루넥 스웨트셔츠 모두 STONE ISLAN
<재벌×형사> 시청 연령층이 폭넓어 알아보는 분이 많았겠다.
정말 그렇더라. 부산에서 국밥집 아주머니들이 다 알아보더라. 거의 팬 사인회를 하고 왔다.(웃음) <재벌×형사>는 내가 배우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마침내 빛을 보나 보다. 과거 안보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돌이켜보면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 먹고 입는 것,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준 게 없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많았고, 나를 다그치기만 했다. 고마운 분들에게 보답도 하며 삶의 여유를 찾고 싶다.
어두운 터널을 걸어온 듯하다.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뭐였나?
매번 가족이라고 답했는데, 이제는 내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명절에 초등학교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각자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묵묵하게 나를 응원해주고 있었더라. 내가 나온 방송을 빼놓지 않고 시청한 친구도 있고. 내 사람들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딱 들더라.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 날씨가 정말 따뜻하다. 봄이 오면 하고 싶은 게 있나?
그러게. 부산은 정말 따뜻하더라. 며칠 전 헤어 숍에서 ‘벚꽃 엔딩’이 흘러나왔는데, 기분이 이상하더라. 시간이 되면 벚꽃이 만개한 곳에 가봐야겠다. 의장대 출신이라 진해 군항제에 가곤 했는데, 오랜만에 거기도 가보고 싶다.
오른쪽 _ 네이비 고스트 보머 재킷과 크루넥 스웨트셔츠, 레귤러 핏 카고 팬츠 모두 STONE ISLAND, 슈즈 스타일리스트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