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이가 쎄이했다
‘쎄이(SAAY)’를 하나의 브랜드로 정형화하고 싶다는 그를 만났다.
(인터뷰 진행일 기준) 두 번째 단독 콘서트를 앞두고 있어요. 기존 일정대로라면 작년 12월에 공연을 했어야 하죠?
맞아요. 어느 날 자고 있는데 한밤중에 매니저한테 전화가 왔어요. 큰일 났다고, 지금 바로 뉴스 좀 보라고.
딱 2주 전이었어요. 공연 예정이던 곳에 큰 화재가 난 거예요. 당시에는 멘털이 조금 흔들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하늘이 도운 것 같아요.
더 좋은 공연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인스타그램 스토리 무물(무엇이든 물어보세요)로 셋 리스트를 묻는 팬의 질문에 거의 모든 걸 쏟아낼 거라는 예고를 했어요. 기대해도 될까요?
단독 콘서트는 정규 2집을 내고 재작년에 처음 해봤어요. 그냥 페스티벌 라인업으로 올라가는 것과는 천지차이더라고요. 쎄이만을 위해 오는 사람들이니까 책임감이 막중해요. 이것 말고는 다른 걸 머릿속에 집어 넣을 수도 없어요. 완벽주의자이기도 해서 음악에 관해서는 어떤 실수도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200%를 준비한다면서요. 100% 결과를 내기 위해서.
그래도 한 80% 나오고, 후회도 남아요. 모니터링해보면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싶죠. 무대 구성부터 밴드 합주 등 전반적 음악 디렉션을 모두 제가 하거든요. 주변에서 잘했다고 해줘도 저는 만족스럽지 못하더라고요.
기준이 너무 높은 것 아니에요?
평생 해와서인지 음악은 제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해요. 세 번째 단독 콘서트인데, 공연을 보신 분이라면 ‘멈추지 않고 성장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테고요. 첫 단독 콘서트 후 앨범은 오랜만에 냈지만, 음악은 한 번도 쉬지 않았어요. 3년여간 겪은 성장통을 또 새로운 에너지로 공연에서 내뿜을 수 있지 않을까요.
콘서트 이후 관객들이 공연에 대해 한마디로 어땠다고 말해줬으면 하는지.
“쎄이가 쎄이 했네” 하는 반응이면 좋겠어요. 내 걸 나답게 하는 게 가장 멋진 것 같아요.
“쎄이가 쎄이 했다”는 말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곡이나 앨범 작업을 할 때 레퍼런스 같은 걸 안 둬요. 대부분의 아티스트는 앨범을 만들기 전 시안이 있거든요. 오늘 같은 화보 촬영만 해도 그렇잖아요. 저는 완전 0의 상태에서 음악을 만들어요. 그래서 저만의 색깔이 묻어나올 수 있죠. 존경하는 아티스트는 많지만, 나다울 때가 가장 자유로워요. 아직 성장 중이기에 ‘쎄이’를 완벽하게 정의 내릴 순 없지만, 저를 브랜드로 볼 때 딱 정형화되도록 해볼 거예요. 무대에서 비주얼화했을 때도 ‘쎄이가 쎄이답게 한 무대였다’고 느꼈으면 해요.
그렇군요. 레퍼런스 없이 작업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워요.
이게 반대로 가요. 기본적인 음악을 만들 때 프로세스라면 먼저 비트를 만들어요. 거기에 톱 라인 멜로디를 짜고, 가사를 써서 녹음한 뒤 믹스 마스터링해 앨범을 발매하는 네다섯 단계가 있죠. 저도 이렇게 작곡 공부를 해왔어요.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하다 보니 자꾸 누군가를 따라 하게 되고 재미가 없는 거예요. 이럴거면 다른 아티스트 거 만들고 그들의 요구만 충족시키면 되지, 굳이 왜 내 앨범을 만드나 싶고. 내가 원하던 음악성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새로운 장르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나만 할 수 있는 걸 만들자고 생각한 거죠. 팬들은 알아요. 그냥 제 음악 나오면 “쎄이 거네” 하더라고요.
존경하는 아티스트는 많지만, 나다울 때가 가장 자유로워요.
아직 성장 중이기에 ‘쎄이’를 완벽하게 정의 내릴 순 없지만, 저를 브랜드로 볼 때 딱 정형화되도록 해볼 거예요.
그럼 쎄이의 작업 방식은 어때요?
일단 저는 매일 일기를 쓰고 곡 작업할 때 일기를 가져와요. 인상적이던 순간을 열어 그걸 시 쓰듯이 단조롭게 바꾸고, 거기에 톱 라인을 입혀 프로듀서들과 함께 곡을 만들어요. 완전히 거꾸로 가는 거죠. 사실 전형적인 접근이 아니라 어려워요. 하지만 이렇게 해야 제 얘기부터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제 이름이 ‘쎄이(SAAY)’인 이유이기도 해요. 내 얘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 이걸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해요.
솔로 활동과 함께 프로듀싱도 하는데, 각각 어떤 매력이 있는지.
내 걸 할 때는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어 해소가 돼요. 뿜어내는 에너지가 많은 편이라 계속 나가다 보면 때로 방전이 되거든요. 그러다 다른 아티스트와 함께 작업하면 ‘내 곡을 이렇게도 부르네’ 하며 배우기도 하고, 표현 방법이 각각 달라 오히려 영감을 받아요. 에너지를 표출할 수도, 충전할 수도 있다는 게 행운이죠.
여러 뮤지션과 협업할 때 음악적 비전은 물론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 등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작업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여덟 마디의 짧은 파트라도 이 곡을 왜 썼고 콘셉트는 무엇인지, 가사는 언제 쓴 일기에서 나온 건지 원본까지 보내줘요. 상대방은 귀찮을 수도 있지만, 그래야 좋은 결과물이 나오니까요. 다행히 지금껏 함께 작업해온 아티스트의 성향도 저와 비슷했어요. 진짜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라 인간적으로, 음악적으로 더 친해질 수 있었죠.
콘서트 이후 올해도 공연이나 앨범 발매 계획이 있나요?
머지않은 미래에 싱글이나 EP 한 장 정도 내고 싶어요. 하반기에도 가능하다면 완성도 있는 앨범 두세 장 정도 발매할 예정이에요. 미니 월드 투어를 해도 좋을 것 같고요.원래 국내에 쎄이로 데뷔하기 직전 해외 투어를 먼저 했거든요. 초심으로 돌아가 해외 팬들을 만나고 싶기도 합니다.
월드 투어를 떠올린 계기가 있다면?
항상 마음에 있는 듯해요. 외국에서 투어로 솔로 활동을 시작해서인지 해외에서 여전히 많이 찾아주시고 제 노래를 들어줘요. 반면 무대는 많이 못 보여드렸으니 그런 것에 대한 갈증이 있고, 보답하고 싶어요. 쎄이 음악은 라이브로 들어야 하거든요. 제가 라이브를 좀 잘해서.(웃음)
첫 시작을 해외로 선택한 점도 궁금해요.
제가 하는 장르인 알앤비(R&B)의 본토가 한국은 아니잖아요. 오리지낼리티를 지닌 나라에서 시작하는 게 맞
겠다 싶었죠. 그래야 뿌리가 제대로 잡히고 펼칠 수 있는 노트도 넓어질 거 라고 생각했거든요. 데뷔곡 ‘Circle’을 만들고 나서는 피처링이 필요해 현지 퓨처 알앤비 아티스트 티시 하이먼에게 부탁했어요. 어릴 때부터 간간
이 해외 생활을 해서 해외 프로듀서나 아티스트 친구도 많거든요. 한국에도 유능한 분들이 있지만, 확실히 그들에게 의뢰하고 놀랄 때가 많아요. 예를 들어 국악은 우리나라 거잖아요. 다른 나라에서 아무리 국악이나 태권
도를 배운다 해도 우리나라 사람처럼 잘할 수는 없죠. 그런 결로 접근했어요. 당시 A&R 담당자들과도 뜻이 잘 맞았고요.
영어 가사로 쓴 곡이 꽤 많더라고요.
뉴욕 브루클린 윌리엄스 버그에서 홈스쿨링을 경험했어요. 공교육은 한국에서 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아버지의
사업 덕에 유럽과 일본에서 잠깐 유학했죠. 음악의 첫 장르는 어머니가 하던 국악을 택했고, 뉴욕에서는 재즈를 접했어요. 일본에서는 엑스 재팬 같은 헤비메탈 장르까지 갔어요. 가사를 한글이나 영어라는 틀에 정해두고
쓰진 않아요. 곡을 들었을 때 어울리는 바이브에 맞게 고르는 거죠. 다만 영어 가사를 쓸 때는 어려운 단어는 피해요.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씁니다.
음악적으로 시야가 넓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네요. 지난해 11월 발매한 싱글에서 개인적으로 ‘Ex-TRA’가 인상 깊었어요. ‘애매해진 우리 사이 속 홀로 남겨진 의미 없는 love scene (중간 생략) 이젠 너에게 난 Ex-TRA’라는 가사처럼 이제 더 이상 서로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뜻과 ‘exgirlfriend(전 여자친구)’라는 의미가 함께 담긴 것 같아서요. 자신의 삶을 작업에 투명하게 담아내는 편인가요?
제가 가식적이지 못해요. 인간 권소희도, 뮤지션 쎄이도 가면을 못 쓰는 성격이죠. 특히 음악을 할 때는 솔직한 게 다예요. 뭔가 겪었는데 ‘이건 다른 사람도 공감하겠다’ 싶을 때, 어두운 면이라도 끄집어와요. ‘Ex-TRA’는 친구 사이였다가 연인으로 발전했고, 다시 친구가 된 연애 경험을 가사에 녹여냈어요. 저도 그런 적은 처음이었거든요. 음악을 감정 해소 창구라고 자주 표현하는데, 좋거나 좋지 않은 기억 모두 보내줄 수 있는 중간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혼자 씨름할지라도 트라우마 같은 경험도 음악으로 녹여내요. 그 모든 과정을 거친 후 무대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부를 수 있게 되더라고요.
훌륭한 작업 방식이네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좋은 결과물까지 얻으니까요.
(웃음) 좋은 결과물이라는 게 쉽게 나올 것 같지만, 그 과정에는 굉장히 많은 고민과 충돌이 있죠.
정규 2집 (이하 시네마)는 지난 20대의 희로애락을 담은 앨범이죠. 20대를 돌아보니 흑백영화 같다며 당시 뮤직비디오도 흑백으로 풀어냈어요. 30대 초입인 지금은 삶이나 음악적인 면에서 어떤 게 가장 달라졌나요?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더 살아봐야겠지만, 시야가 좀 더 넓어진 것 같아요. 20대까지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앞만 보고 직진했다면, 지금은 옆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됐다는 것. 아직 서른밖에 안 됐잖아요.(웃음)
현재는 어떤 색에 가깝나요?
아이보리색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화이트에서 조금 물든 상태. 제가 왜 흑백영화로 시네마를 표현했냐면, 20대의 나는 아무것도 없는 스케치북이었는데 어떻게든 세상에 나를 뽐내려고 맞지 않는 색까지 뿌려가며 채우려고 했어요. 20대 내내 스케치북이 화려한 컬러로 물들어 있는 줄로만 안 거죠. 근데 30대가 되니 그냥 빈 스케치북인 거예요. 고군분투했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단단해졌어요.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는 것처럼요. 하지만분명 그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의 쎄이를 만든 거겠죠.
밑거름이 됐지만 ‘고생했다’, ‘잘했다’고 보내주는 해소 창구가 필요하긴 했어요. 더 나은 음악을 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죠. 모두가 각자 인생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이잖아요. 내 인생은 오래된 영화처럼 흘렀더라고요. 너무 많이 봐서 닳아버린 빈티지 필름처럼. 다섯 살 때 국악을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처음 무대에 섰거든요. 그때는 즐기면서 했는데, 일이 되고 사람들이 붙고 비즈니스가 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압박과 부담감이 있었어요. 이제는 즐기면서도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는데, 사람이 쉽게 바뀌진 않겠죠.(웃음) 여전히 완벽을 추구하고, 하고 싶은 게 많아 컬러 한 스푼 툭 떨어뜨린 느낌이에요.
그냥 “안녕하세요, 쎄이입니다.” 이 소개를 언제까지 해야 할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평생을 달고 살아온 문장이지만, 여전히 저를 아는 분보다는 모르는 분이 더 많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그냥 “저는 쎄이입니다”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완벽을 추구하는 맥락에서 정규 앨범도 중요하게 생각하죠?
뮤지션은 명함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제 기준에서는 정규 앨범이 아티스트의명함인 거예요. 싱글과 미니 앨범 다 좋지만, 빨리 소비되고 지나가는 세상이니까. 자라면서 들은 유재하와 장사익 선배님, 그리고 잭슨파이브나 데스티니 차일드 등. 그 시대 음악을 선망하던 저는 그게 답이라고 생각해요. 유행은 돌고 돈다고, 다시 정규 시대가 오는 것 같아요.
한 인터뷰에서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는 자신의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뮤지션이라고 말했어요.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고, 투영된 건 어떤 부분인지 궁금해요.
가장 큰 부분은 정규 앨범을 만드는 프로세스예요. 그들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음악을 들을 때 흐름과 전개, 어떤 포인트가 있는지 앨범을 보고 듣기만 해도 아트 피스 같은 느낌이잖아요. 명반이라고 꼽히는 앨범을 보면 다 그들 작품이에요. 그리고 존경하던 뮤지션 대부분 무대에서도 대단한 퍼포머였어요. 앨범이 정말 좋아도 무대가 엉성하다면 이만큼 추종하진 않았을 거예요. 음악을 시각화했을 때 뮤지션이 보여줘야 하는 파워가 중요하다는 걸 배웠어요.
올해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그냥 “안녕하세요, 쎄이입니다.” 이 소개를 언제까지 해야 할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평생을 달고 살아온 문장이지만, 여전히 저를 아는 분보다는 모르는 분이 더 많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그냥 “저는 쎄이입니다”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이제 막 어떻게 해야 할지 느낌이 오거든요. 내 이름을 걸고 증명했던 단독 콘서트가 제게는 의미가 컸어요. 마지막 콘서트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어졌고, 또 두 번째를 하니까 ‘내가 20년 이상 음악을 해온 게 헛된 건 아니었구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