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얼굴을 지나, 서현우
수많은 얼굴을 지나, 서현우.

놀랐어요. 체중을 많이 감량했죠? 네. 최대 28kg까지 찌웠다가 다시 뺐어요. 감량은 25kg 정도 했고요. 오래 건강하게 연기하려면 잘 관리해야겠더라고요. 예전엔 밤샘 촬영을 해도 놀 기운은 남아 있었는데.(웃음)
또 놀란 게 있어요. 포즈를 취할 때 보니 몸이 유연하더군요. 고등학생 때 댄스부였다고 들었는데, 몸이 기억하나 봐요. 중간에 호흡곤란이 좀 오긴 했어요.(웃음) 잠깐 춤을 배우긴 했지만, 제가 몸을 유연하게 쓰는 편은 아니에요.
촬영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할 만큼 몰입하는 눈빛이었어요. 사실은 별생각 없었어요.(웃음)
클로즈업 컷을 찍을 때 다양한 얼굴이 보여서 드린 말씀이에요. <킬러들의 쇼핑몰> 속 이성조가 보였다가 <악의 꽃> 속 김무진이 보이기도 했고, 사람 서현우가 스칠 때도 있었거든요. 아, 그때는 살짝 울컥했어요. 제 눈앞에 물병과 카메라가 놓여 있었잖아요. 렌즈를 통해 찰랑거리는 물에 비친 제 얼굴이 보이더라고요. 특별히 뭔가 떠오른 건 아닌데, 순간 울컥했어요.

촬영하는 동안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었어요. 4년 전, 지금 소속사 대표 번호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요. 참, 성격이 팔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기다리는 성격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연락을 하거나 소개받을 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적은 없었어요.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행동하죠.
당시엔 무엇이 필요했나요? 미팅을 원했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고, 같이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원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때 전화를 받은 분이 바로 소속사 대표님이더라고요.
극적이네요. 전공도 영문학에서 연극으로 바꾼 걸 보면 결단력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죠? 한번 마음먹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아요.
그래도 진로를 변경하는 만큼 신중했을 것 같은데, 확신이 있었나요? 아니면 갈망이 컸나요? 직업으로 삼겠다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스물한두 살 때였으니,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보고 싶었죠. 그게 전부였어요. 최소한 영문학은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면 뭘 공부할까? 수업 시간에 즐거웠던 기억을 찬찬히 돌아보니, 고등학교 연극반 활동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당시 연극반 지도 선생님에게 연락을 드렸죠. 그러고 보니 이것도 제가 먼저 연락을 했네요.(웃음) 마침 한예종 대학원에 다니고 계셔서 입시 준비할 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렇게 20년이 흘렀네요. 동력은 뭐였나요? 뭘 몰라서. 오히려 연기를 할수록 더 모르겠고, 욕심이 생기니까 계속 해보고 싶더라고요. 매달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아마 일이 손에 착 붙었으면 놓았을 수도 있는데, 계속 모르겠으니 파고든 것 같아요.

조연과 단역으로 보낸 시간이 꽤 길었어요. 2010년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으로 데뷔했고, 첫 주연작 <악의 꽃>을 맡기까지 10년이 걸렸죠. 짐작컨대, 불안감도 컸을 것 같아요. 안정감을 느낀 때는 언제인가요? ‘이게 내 직업이다’고 말할 수 있었던 시기랄까. 아무래도 <악의 꽃>이죠. 영화 <헤어질 결심>도 커다란 전환점이었고. 사철성을 연기하면서 자신감이 붙었어요. 뭔가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맞아요. <남산의 부장들> 전두혁, <나의 아저씨> 송과장 등 ‘알고 보면 서현우’인 작품이 참 많은데, <헤어질 결심>에서는 특히 서현우가 보이지 않았어요. 살을 찌운 것도 한몫했지만, 1분가량 사투리로 진술하는 장면은 숨죽이고 볼 만큼 맛깔스러웠거든요. 취조실에서 독백처럼 대사를 치는 장면이었죠. 당시 현장 분위기를 아직도 기억해요. 박찬욱 감독님의 ‘컷’ 소리가 끝나자마자 스태프들이 박수를 치더라고요. 사실 연기하면서 그런 경험이 흔치 않거든요. 일곱 테이크 만에 오케이를 받았을 거예요. 어리둥절한 상태로 좁은 세트장을 빠져나가려는데, 꿈을 꾸는 것처럼 박찬욱 감독님이 “모니터링 한번 해보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감독님 자리에 앉았죠. 솔직히 눈에 잘 안 들어왔어요. 그때 감독님이 “너무 흥미롭게 잘 연기해줘서 고맙다”라고 하시는데 이런 저런 생각이 스쳤어요. 그 순간만큼은 퍼즐이 완성 된 듯한 느낌이었죠.
이해영 감독이 서현우 배우가 박찬욱 감독의 작품 때문에 증량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령>에 캐스팅했다는 일화도 있어요. 천계장 역도 확연히 다른 얼굴을 보여준 캐릭터죠. 보통 목소리와 제스처 등 배우의 결을 살려 접근하는 것이 연기의 첫 단계라고 생각해요. 캐릭터를 입히는 건 정말 어려운 그다음 단계라고 보고요. <유령>의 천계장이 그걸 알려준 역할이었어요.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작품이죠. 행동과 표정, 말투를 만들어 구사했는데, 촬영이 진행될수록 캐릭터가 점점 만들어져간다는 걸 느꼈어요. 배우로서 또 한 번 확장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사실 캐릭터를 연구하는 데 정답은 없잖아요. 그만큼 힘든 작업이기도 하고.

캐릭터를 만들 때 도움을 받는 것이 있나요?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해요. 이건 영업 비밀일 수도 있는데, 정말 안 풀릴 때는 감독님을 관찰해요. 예를 들면, 초조함을 표현해야 할 때 사람마다 드러내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은 발을 동동 구르고, 또 누군가는 손톱을 물어뜯을 수도 있고요. 나름 열심히 표현했는데, 이렇게 디렉팅을 주시는 감독님이 있죠. “초조함이 더 보이면 좋겠어.”(웃음) 그러면 감독님이 초조할 때 어떻게 하는지 관찰한 후 연기에 심으면 오케이받을 확률이 높아요.(웃음)
영업 비밀이 맞네요. 장난 아니죠?(웃음) 이게 왜 가능하냐면, 창작 세계는 결국 창작자로부터 나오거든요. 감독님은 그 세계관을 창조한 사람이잖아요.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면, 감독님이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이 필요한 거죠. 저만의 초조함을 보여주면 어느 정도는 통할 수 있어도 100% 공감받긴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에게 질문을 많이 던져요. “이 역할을 왜 만드셨나요?”, “이 작품은 어디에서 출발했나요?” 그 시선을 공유하면 연기하는 게 한결 편해지더라고요. 감독님은 제 첫 번째 관객이잖아요. 고객의 니즈에 맞게 준비해야죠.(웃음)

<우리영화>에서 맡은 제작사 대표 ‘부승원’은 주변에 참고할 만한 인물도 많았을 것 같아요. 그렇죠. 하지만 정보가 많으면 오히려 생각이 복잡해질 것 같아 유심히 관찰만 했어요.
이쯤 되면, 배우 서현우를 만든 건 통찰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연기 전공자들은 다 그럴 거예요. 매일 관찰 일지를 썼거든요. 지금도 가끔 써요.
같은 걸 봐도 발견하는 것은 저마다 다르잖아요. 그 사람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고. 맞아요. 지금 언뜻 생각나는 게 있네요. 어떤 친구는 정밀 묘사하듯 쓰더라고요. 이를테면, “이 병은 사각형이고 알루미늄 재질이고…” 이런 식으로. 또 어떤 친구는 “이 병 소재는 미국에서 수입한 것 같다”처럼 상상해 쓰기도 했고. 또 누구는 병이 주는 심상에 대해 써요. “어릴 때 아버지가 퇴근길에 사오곤했던 음료수병이 생각났다.” 뭐 이런 식이죠. 저는 좀 믹스형인 것 같은데. 추상적일 때도, 현실적일 때도 있었죠.(웃음)
오늘은 무엇을 유심히 봤나요? 촬영하는 동안 고장난 화장실이 조금씩 수리되어가는 과정을 봤어요. 이제 다 고쳤더군요.(웃음)


차기작 이야기를 아직 못 했네요. 7월 26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84제곱미터>가 공개됩니다. 이번엔 어떤 얼굴을 보여주나요? 이만큼 편한 복장으로 연기 해보는 것도 처음이에요. 늘 슬리퍼, 반바지, 민소매 차림으로 현장에 있었어요. 층간 소음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보니 집에서처럼 편안한 모습이죠. 또 이렇게까지 에너제틱하게 표현한 적이 있었나 싶을정도로 연기했어요. 연극할 때 말고는 없었던 것 같아요. 복싱도 다시 배웠고요. 진호는 굉장히 다이내믹한 인물이에요. 저는 강하늘 배우가 연기한 ‘우성’의 윗집 사람이에요. 우성이 층간 소음에 시달리고, 저는 의심을 받으면서도 그를 도와 진실을 파헤쳐요. 리더십 있고 터프한 면모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 표현해보고 싶은 모습도 있나요? 그동안 외형적 변화가 두드러진 캐릭터를 많이 맡았어요. 이제는 내면에 더 집중해보고 싶어요. 감정의 섬세한 결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 그동안 누군가에게 감정을 유도하거나 전달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면, 이제는 내 안에서 비롯된 감정을 오롯이 표현해보고 싶어요. 말이 조금 어렵나요?(웃음) 예를 들어 남녀 간 로맨스일 수도 있고, 질투나 배신 같은 감정일 수도 있고요. 이전과 다른 질감을 보여주면 좋겠어요. 내면의 모습을 잘 비벼내 신선하게 표현해보고 싶어요.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유심히 보는 부분이 있나요? 대사체를 많이 봐요. 내 언어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여백을 채울 수 있을까. 이런 걸 염두에 두죠. 문장이 너무 친절한 것보다는 제가 들어갈 틈이 있으면 재미를 느껴요.
예를 들면요? 내일 첫 촬영하는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웹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인데, 지문이 거의 없고 상대 배우와 의 ‘티키타카’로 이뤄진 장면이 많아요. 근데 대사가 입에 쫙쫙 붙더라고요. 또 한 번 새로운 경험을 했어요. 운영빈 감독님이 시나리오까지 썼는데, 감독님에게도 말씀드렸어요.
언제 공개되나요? 내년 상반기일 거예요.
연기 이야기만 했네요. 연기 외 즐거움은 어디에서 찾나요? 목욕탕에서. 사우나 후 냉탕에 들어가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