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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과 전율

선우예권. 다시, 라흐마니노프

촬영 도중 즉흥연주로 스튜디오가 잠시 공연장이된 것 같았다. 푹 빠져서 듣는 바람에 예상보다 촬영이 길어졌다. 이번 앨범에 있는 곡을 들려드리면 좋았을 텐데.(웃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을 연주한 이유가 있나? 사진작가님이 원하는 표정이 나올것 같았다.(웃음) 연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분위기에 맞는 표정이 나오는데, ‘피아노협주곡 2번’은 드라마틱한 작품이라 다양한 모습이 표출된다.

사진작가님도 여운 때문인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더라. 옆 건물에 있던 분도 잘 들었다고 인사하고. (웃음) 감사하다.

마침 오늘(12일)이 앨범 <라흐마니노프, 리플렉 션> 발매일이다. 3년 만에 발매하는 스튜디오 앨범 아닌가. <모차르트> 앨범이 2020년에 나왔 으니 벌써 그렇게 됐다. 지난 6월 통영에 내려가 이틀 동안 녹음했다.

통영에서 녹음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통영국제 음악당에서 녹음했는데, 개인적으로 국내에서는 울림이 가장 좋은 공연장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다음 주부터 리사이틀을 진행하지 않나? 팬데믹이 끝난 뒤 첫 리사이틀인 만큼 기대가 크겠 다. 맞다. 9월 23일 경기도 화성을 시작으로 10 월 20일 여수까지 11개 도시에서 진행한다. 보통 2년 주기로 독주회를 하는데, 2021년 리사 이틀 당시에는 코로나19 시기라 객석을 30% 밖에 못 열었고, 사인회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엔 오랜만에 관객과 직접 대면하고 인사도 나눌 수있어 특별할 것 같다.

손끝에서 퍼지는 피아노 선율에는 온기가 있었고, 그 따스함이 공연장 전체를 감싸는 듯했다. 그런 연주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을 맞아 이 앨범을 기획한 걸로 안다. 사실 본인에게는 여러모로 의미 있는 작곡가 아닌가. 2017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 에서 우승을 안겨준 작품의 작곡가이기도 하고. 음악을 처음 시작한 게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땐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좋아했다. 그 외 다른 음악을 들을 때는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사실 클래식을 전공하지 않아도 작품의 깊이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난 음악을 전공했음에도 어릴 땐 그걸 몰랐다. 그런데 슈베르트 외 큰 울림을 받은 게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이었다. 조금 뒤늦게 귀가 열린 것 같다. 귀가 열린다는 건 단지 음악을 들을 줄 안다는 게 아니라 귀를 통해 전달된 음악이 가슴까지 전해지는 걸 말한다.

라흐마니노프에게 울림을 받았던, 그 첫 기억이 궁금하다. 열다섯 살에 미국 커티스 음악원으로 유학 가서 처음 배운 작품이 라흐마니노프의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다. 이번 앨범의 시작을 여는 작품이기도 한데, 리듬을 구축하는 방식은 복잡하지만 짜릿한 전율을 준다. 당시 세이무어 립킨 선생님은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을 자주 연주해주시곤 했다.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선생님의 피아노 선율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라흐마니노프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작곡가 중 한 명이다.

이번 앨범에 총 6개 작품을 담았다. 방금 말한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처럼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선택한 건가? 특별한 의미보다는 라흐 마니노프 특유의 감성이 가장 잘 표현된, 내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작품을 모았다. ‘사랑의 슬픔’은 원래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곡인데,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로 편곡해서 연주한 거다. 피아노 솔로곡으로 다시 쓰이면서 화성적 측면도 그렇고, 더 풍성해졌다. 또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중 잘 알려진 ‘첼로 소나타 3악장’은 피아 니스트 볼로도스가 피아노 솔로 버전으로 편곡 했다. 원곡은 라흐마니노프의 짙은 애수가 묻어 나는 반면, 볼로도스는 그 슬픔을 옅게, 하지만 겹겹이 레이어를 쌓아 올려 잔잔한 울림을 전달 한다.

앨범의 흐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그렇다. 처음과 마지막에 변주곡 2개(‘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 를 배치했고, 메인이 되는 두 작품 사이에는 편안하면서도 라흐마니노프의 색채가 흐르는 작품으로 구성했다.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감성’을 언급했는데, 라흐 마니노프다움에 대해 좀 더 설명해줄 수 있나? 예권 씨의 해석이 궁금하다. 가장 애정하는 작곡가를 이야기할 때 슈베르트를 언급한다. 굳이 순위를 매겨야 한다면 그렇다. 슈베르트와 라흐마니노프 사이에는 감성적으로 접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슴을 들끓게 하는 뭔가가 있다. 하지만 감정선에서는 확실히 차이점이 있다. 슈베르 트는 우수에 차 있다고 해야 할까. 갈망하는 것을 꾹꾹 눌러 담으며 참고 참다가 눈시울이 붉어 지는 느낌이다. 반면 라흐마니노프는 슬픔을 포효한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 들끓듯이 끓어오르다 폭발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두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다 눈물을 흘린 적도 있나? 그럴 때가 있다. 그렇다고 자아도취에 빠지는 건 아니다. 슈베르트의 작품을 연주할 때 더 그렇다. 눈물이 맺히는 정도? 라흐마니노프는 눈물 흘리기엔 패시지(passage)의 변화가 드라마틱 하다. 순간 슬픔에 젖어 있다가도 또 금방 빠져 나와 정신없이 연주하며 그 감정을 흘려보낸다.

슈베르트를 가장 애정하는 작곡가라고 했지만, 정작 아직 슈베르트 레퍼토리로 앨범을 내진 않았다.
항상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아껴두고 싶은 마음이 크다.

감정적으로 더 무르익었을 때 연주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완벽하게 소화하고 싶어서? 나도 잘모르겠다. 그냥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앨범이 나올 수도 있고. 더 정돈된 상황에서 녹음하고 싶은 건 확실하다.

이번 앨범명에 리플렉션(A Reflection)이라는 단어를 붙였는데, 특별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나? 이번 녹음을 마치고 복잡한 감정을 마주 했다. 아쉬움도 남았지만, 거울을 보듯 내 본연의 모습을 직면하고 점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 단어를 붙였다. 나를 투영한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 의미도 있다. 한번은 통영에서 연습한 후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밤바다에 비친 달을 봤다. 그 달빛을 보며 간절히 소망을 되새 기기도 했다. 물결에 일렁이는 달빛은 평소 애정하는 풍경이기도 하고.

어떤 소망이었나? ‘지금 이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길’ 하고 빌었 다. 앨범 내지에도 자필로 써서 남겼다.

라흐마니노프는 한국인에게 특히 친숙한 작곡가다. 임윤찬, 조성진, 선우예권의 ‘피아노협주곡 3 번’을 비교한 리뷰가 많은데, 임윤찬의 연주가 강렬하다면 예권 씨의 연주는 정갈하고 기품이 흐른다고 하더라. 동의하나? 좋은 단어들은 다 좋다.(웃음) 임윤찬은 소리가 굉장히 단단하고 힘이 느껴진다. 젊어서 그런지 체력이 좋더라.(웃 음) 또 연주하는 모습이나 소리를 내는 부분에서 손민수 선생님의 모습도 확실히 엿보이고. 선후배를 떠나 대단한 친구다. 어린 나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재능이 무궁무진하다.

혹시 라흐마니노프에게 훔치고 싶은 재능이 있나? 그의 큰 손은 피아니스트에게는 탐나는 재능일 것 같은데. 손이 더 컸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엄지와 약지로 13도를 편안하게 잡을 정도로 손이 컸다. 나는 손의 각도를 조금 아래로 기울여야 겨우 10도까지 닿는다.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손가락 길이에 맞춰 작곡을 주로 했는데, 코드를 여러 개 잡는 음이 특히 많다. 그런데 그 코드를 다 잡는다 해도 어떤 손가락에 힘을 주고 밸런스를 두느냐에 따라 소리의 색깔과 무게, 질감이 달라진다. 그 모든 것을 미세하게 컨트롤하려면 손이 클수록 좋다. 그런데 뭐 어쩔 수 없지 않나.(웃음)

피지컬적인 부분 외에는? 라흐마니노프의 레코 딩을 들으면 루바토(독주자의 재량에 따라 템포를 조금 빠르게 혹은 조금 느리게 연주하는 기법)의 쓰임이라든가, 템포 안에서의 자유로움이 부럽다. 하지만 비슷하게 흉내 내는 건 내 것이 아니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어색하게 들릴 거다. 단순히 호기심 정도다.

연주자 중 공연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앨범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본인은 어떤가? 글렌 굴드는 생전에 공연은 절제하고 스튜디오 앨범 작업에 더 집중했다. 난 녹음보다 공연을 더 선호한다. 기록을 남기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모든 연주자가 그렇겠지만, 100% 만족이라는 건 없다. 앨범으로 기록되면 1%의 부족함도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 아쉬움이 기록되는 거니 그리 달가운 작업은 아니다. 그래도 녹음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 있다. 훗날 내가 세상을 떠나도 앨범은 남을 테니 까. 내 이름과 존재를 남기겠다는 거창한 마음은 아니다. 음악을 하는 한 내 본업은 연주자고, 평생 이것밖에 모르고 살아왔으니 뭔가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또 내 연주를 좋아해주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아쉬운 부분이 들리면 본인 앨범 듣는 걸 꺼리겠 다. 잘 듣지 않는다. 그런데 <모차르트> 앨범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는 종종 찾아 들었다. 물론 아쉬움이 있지만, 나쁘지 않게 들릴 때도 있다. 다시 꺼내 들을 때는 내 앨범이라는 인식은 지우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듣는 편이다.

2017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 실황 앨범은 어떤 가? 그때는 지금보다 한참 어릴 때인데. 2017년 당시에는 자주 들었다. 앨범이 발매되고 1~2년 지나 들을 땐 어린 느낌이 확실히 있더라. 그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결점이 보일지언정 창피하진 않다. 그렇다고 그 실황 앨범이 창피하 다는 건 아니다.(웃음)

뭐든 그렇지 않나. 나이가 들수록 경험치가 쌓이니더 많은 것이 눈에 보일 수밖에. 맞다. 콩쿠르 우승 자에게는 100회 정도 공연이 부여되는데, 그 과정을 통해 정말 많이 성장했다. 2017년 연주 영상을 찾아보면 피아노에 가까이 붙어 아등바등 연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보통 젊은 연주자들이 긴장하면 그렇게 된다. 몸이 경직되니 당연히 소리가 넓게 펼쳐지지 못하고 그 안에만 머물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점이 눈에 많이 보이더라.

공연을 더 선호다고 했는데, 무대의 매력은 무엇인가? 희소성이다. 연주회는 그 공간, 그 찰나에만 존재하는 소리가 있고 두근거림이 있다. 또 한공간에서 함께 호흡한 사람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라 더욱 소중하다. 또 무대에 오르면 온갖 감각이 하나하나 살아나는 느낌이 있다. 특히 리사이틀의 경우 혼자 연주하니 외롭다고 느낄 수 있는데, 난 외로움보다 잠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다. 그리고 모든 소리를 흡수하는 공연장에서 내가 내는 소리와 그다음에 나올 소리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칭해나가는 과정, 뇌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그 느낌이 좋다.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 100여 명의 호흡이 딱 맞아떨어지는 걸느낄 때 희열이 엄청나다. 그 순간엔 그곳의 모든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희열감은 연주자들이 지닌 특권이겠다. 젊은 연주자에게는 콩쿠르 우승이 목표 중 하나가 될 수있지만, 이후의 목적지는 어디인지 궁금하다. 동기부여가 있어야 정진할 수 있지 않나. 공연 티켓을 사서 공연을 보러 오는 분들에게 아쉬움이 덜한 연주를 들려드리고 싶다. 사명감을 가져야 지속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책임감으로 연주 하는 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한 헌신을 하고 싶다.

그럼, 최종 목적지는 어디이길 바라나? 연주자다.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 사람들 대부분 목표와 꿈은 연주자다. 그런데 학업을 마치고 나이가 들면서 타협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처음 꿈을 평생 지켜나가는 것, 계속 연마하며 정진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경화 선생님, 백건우 선생님처럼 지금도 무대에 오르는 선배 음악가를 보면 존경심이 든다. 오랜 세월 연주를 해왔다고 해서 결코 우리보다 열정이 덜하지도 않으시다.

어떤 색깔을 지닌 피아니스트로 기억되고 싶은가? 글쎄. 내 색깔을 정의하긴 힘들지만, 바람은 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연주자. 그게 내색깔이면 좋겠다.

그 말을 들으니 올 가을·겨울엔 예권 씨의 연주를 들어야겠다. 감사하다. 난 운이 좋게도 훌륭한 스승을 많이 만났다. 특히 매네스 음악 대학에서 사사했던 리처드 구드 선생님은 내게 스타 같은 존재였다. 그만큼 동경하던 분이다. 필라델 피아에 그분의 리사이틀을 보러 갔을 때 따스함을 경험했다. 그분의 손끝에서 퍼지는 피아노 선율에는 온기가 있었고, 그 따스함이 공연장 전체를 감싸는 듯했다. 그런 연주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에디터 이도연 사진 김성민 헤어&메이크업 스텔라 심 스타일링 권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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