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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하는 박지환

밤잠 설쳤던 시간들이 빚어낸 그의 지금, 이 순간.

트렌치코트와 블랙 구두 모두 McQueen by Seán McGirr,
슬랙스 Black Moment.

오랜만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공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책도 읽고, 예전에 하다가 만 생각을 계속 파기도 하고요.

어떤 책을 읽고 있나요? 딱 한 권을 네 번째 읽고 있어요. 수도사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가 쓴 <공부하는 삶>이라는 책이죠. 어느 날 더 이상 발전도 없고, 영감도 새로움도 찾아오지 않아 썩어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고민하다가 낙향한 스승님께 살려 달라고 전화했죠. 그때 수양하듯, 기도하듯 읽어보라고 추천 해주신 책이에요.

원래 한 권을 여러 번 읽는 편인가요? 시시하면 바로 덮어요. 그런데 이 책은 너무 좋았고, 경전처럼 다가왔어요. 목표가 있거나 뭔가 간절한 사람에게 ‘기본’에 대해 가르쳐줘요. 한 번만 읽고 끝낼 수 없어 앞으로 서너 번은 더 읽어볼 생각이에요.

스트라이프 그레이 재킷과 팬츠 모두 MÜNN, 신발 Zara,
이너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래전부터 연기에 대한 글이나 일기를 쓴 ‘내 노트’가 있다고 알고 있어요. 거기에도 무언가 적었나요? 초반에 한창 인상 깊은 구절을 기록하다가 그런 짓 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와서 더는 안 했어요.(웃음) 자연스럽게 사숙하고 묵념해야 하는데 ‘내가 대단히 뭔가 하려고 들었구나’ 싶었죠. 몇 번 읽다가 차오르는 생각만 적었어요. ‘도시와 인연을 끊자’, ‘시골에서 살자’.

그럼 영월에 마련해둔 오두막으로 가나요?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이제는 좀 재미없게 살아보려고요. 그동안 대단히 재밌게 산 건 아니지만 좀 더 심심한 느낌으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쉰 살이 되기 전에 아무것도 안 하고 공부에 집중해보고 싶어요. 스님들은 무문관을 하러 3년 동안 골방에 들어가요. 밖에서 문을 잠그고, 넣어주는 음식만 먹으면서 수행하는 거죠. 물론 그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못 할 것 같아요. 촬영할 때만 왔다 갔다 하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서울에 갈 생각입니다.

잃었던 열정을 찾고자 하는 건가요? 이제는 그런 걸 찾을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공부하는 삶>에도 그런 얘기가 나와요. 열정은 20~30대 때 타오르는 감정이죠. 반면 40대 중반을 넘어 가면 조금 더 깊어지고, 용서하고, 이해해볼까 해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안 해봤으니까 쉽게 말할 순 없지만, 해보려고요.

한 차원 더 깊어지는. 아뇨. 그런 거창한 것 말고요. 아무것도 안 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있어 보이게 써주지 않으셔도 돼요.(웃음) 최대한 있는 그대로 써주세요.

이해해주세요. 직업병이라, 자꾸 정리하려고 하거든요. 왜냐하면 그동안 부족하니까 내게 없는 걸 있는 척도 해보고, 감추려고도 했어요. 조금밖에 없는데, 과대 포장한 것도 많았죠. 다가올 50대에 어떻게 연기하고 살아야 하나 생각하면, 조금 더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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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인터뷰를 보면서, 생동하는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배우 박지환 뒤에는 끊임없이 고뇌하는 시간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모니터링을 거의 하지 않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걸 선호하지만 그건 곧 숨은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거니까요. 죽을 만큼 열심히 무언가 포장해보기도 하고, 닦아보기도 하고, 다른 걸 붙여보기도 하고 다 해봤어요. 어떤 배역을 맡아도 고민하기보다 그냥 해버려요.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거든요. 짧은 순간에 제가 한 인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요. 생각이나 평가는 보는 사람이 하는 거죠. 저는 제가 해야 할 부분에 최선을 다하고, 그 순간을 빛나게 하는 것뿐이에요.

어떻게 ‘그냥’ 할 수 있죠? 막 하지도, 깊이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동안 쌓아온 시간 덕분이겠죠. 공부하거나 책을 읽거나 밤잠 설치며 고뇌했던 시간, 그 모든 걸 가지고 지금 느끼는 걸 하는 거예요. 조금 놓치거나 지나쳐도 어쩔 수 없어요. 작업에 온전히 집중하지만, 편안하게 하려는 거죠.

이런 이야기 싫어하실 것 같지만, 어느 정도 통달했다는 느낌도 들어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얼마 전에도 친한 선배랑 저녁쯤 만나서 막걸리를 한두 잔 마셨어요. 둘이서 “보이지 않는 갈 길이 이렇게나 멀다니”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죠. 끝도 안 나는 길이라는 걸 알고,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아니까. 계속 가다가 죽으면 그게 끝이겠죠. 다만 살아 있는 동안 재밌게 공부하고,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얘기하고 싶어요. 계절이 변하듯 자연스럽게.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 공부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걸 조금씩 해나가는 거죠. 방금 씨앗을 심었는데, 당장 싹을 틔우기 위해 비료나 물을 많이 주면 오히려 죽잖아요. 그 시간을 계속 기다려보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나오지 않을까요?(웃음) 아니면 어쩔 수 없죠. 과정을 사랑하는 게 공부인 것 같아요.

과정이 중요한데, 결과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인지 그게 참 어렵게 느껴져요. 저도 처음부터 그러진 못했어요. 20대 때는 지독했죠. 무대에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부딪히면 무서운 줄 모르고 선배한테 따지고 그랬어요. 이제는 뜨거운 불이 아니라 차가운 불 같아요. 막 쏟아붓는 열정이 아니라 차갑게 불태우는 거죠.

‘차가운 불’이라는 말이 참 좋네요. 아무도 안 다치잖아요.

소라색 니트 카디건 Satur, 스니커즈 Adidas,
이너와 하의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청춘이 사라져가는 걸 느꼈을 때 친한 정승길 배우와 이야기 나누면서 그게 ‘고독’이라는 걸 알았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그때 ‘고독을 잘 이용할 줄 알아야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눴던데, 고독을 잘 즐기고 있는지 궁금해요. 30대 초·중반에 그런 감정을 느꼈어요. 이제는 벗어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요. 고독이 베스트 프렌드라는 생각으로 같이 살아요. 처음엔 배우로서 모든 걸 걸고 덤볐고, 취하려고 했어요. 어쩌면 내가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두려움이 밀려왔죠. 그때 ‘나이를 먹는 건가’ 싶었어요.

작품을 보는 시선도 남다를 것 같아요. 역할을 따지지 않고 작품이 좋으면 하는 편이에요.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도 그렇게 참여했죠. 지나가는 역할이라도 하고 싶었어요. 대본이 좋다면 대단히 회자되지 않더라도 그 작품에서 같이 느끼고 호흡하고 싶어요.

그래서 특별 출연을 자주 하시는군요. 영화 <보스>가 개봉 예정이고, 9월에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탁류> 공개를 앞두고 있죠. <보스>는 친구 세 명이 큰 조직의 형님처럼 모시던 사람을 잃고, 누가 형님이 될지 실랑이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세 친구 중 한 명인 저는 하고 싶은데 안 시켜주고, 두 사람은 형님을 하기 싫어하죠.(웃음) 공교롭게 <탁류>에서는 한강 나루터 왈패의 두목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되어버린 역할로 나와요.

블루 재킷 Thisisneverthat, 니트 베스트 Heute,
셔츠 Secondmono, 슬랙스 Nuakle.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강매강>에서 ‘무중력’의 옴므 파탈 연기도 인상적이었어요. 재치 있는 데다 추진력 강한 형사였죠. 너무 어색했어요. 마성의 매력을 연기하라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감독님한테 물었죠. 그냥 있다고 생각하고 하라더군요.(웃음) 즐겁게 했지만, 자칫 캐릭터가 우스워질까 봐 경계하고 고민도 많이 한 작품이에요.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쌓아온 시간을 가지고 하신 거죠? 아뇨. 모르겠어요.(웃음) 옴므 파탈 연기를 할 때 NG가 가장 많이 났어요.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더군요. 그냥 꾹 참고 했어요.

<범죄도시> 시리즈를 비롯해 <성난 황소>까지 함께한 마동석 배우와의 인연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어요. 좋은 형이죠. 서로 믿고 특별히 뭔가 나누지 않아도 현장에서 바로 알아챌 수 있는 사이예요. 심정과 의중, 마음의 온도까지 느껴지는 그런 사이. 대부분 배우들은 서로 그러려고 노력을 많이 하기도 해요.

외향적인 편은 아니시죠? 외향, 내향 동서남북 위아래 모두 가지고 있어요.

역시 옴므 파탈. 아니, 그런 건 아니고.(웃음) 저는 그때그때 달라요.

안경 Ed Hardy, 시계 Hamilton,
터틀넥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연기의 시작은 연극이었고, 20대에 떠난 무전 여행에서 ‘연극을 하면 세상과 사람에 대해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시작했죠. 실제로 세상과 사람을 더 깊이 알게 됐나요? ‘연기로는 세상과 사람을 알 수 없구나’ 하는 걸 진작 깨달았어요. 그 무엇으로도 사람은 알기 어렵다는 걸 이해하고 그냥 살아요.

그런데도 연기를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요? ‘얘’가 나랑 제일 친한 친구니까요. 스무 살 때부터 이것만 해왔고, 같이 하는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인물을 공부하고, 성장하고, 욕심도 내보고, 후회도 해봤는데 갑자기 이별할 순 없잖아요. 오랜 선생님, 선배들도 그렇게 해왔고. 영광이 사라진다고 해서 싫어지면 진짜로 좋아하는 게 아니죠.

연기의 시작점이고, 무대를 사랑하는 만큼 언젠가 무대에서 만날 박지환 배우도 기대돼요. 하고 싶어요. 제안도 들어오고 해보려고도 하는데, 쉽지 않네요. 아직 무대로 돌아가지 못한 건, 내가 가지고 쓸 수 있는 시간이 헌신할 만큼 나오지 않아서예요. 연극은 시간을 투자해서 계속 연습하고 배우들과 함께 있어야 해요.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내 위주로 연습하거나 무대에 오르는 건 동료들한테도 예의가 아니죠. 내가 뭐라고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무대로 돌아가나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무대에 설 수 있는 데다 비교적 자유롭게 시간도 쓸 수 있는 모노 드라마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만 하고 있어요.

좋은데요. 예전에 두 시간짜리 모노드라마를 한 적이 있어요. 그 작품을 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요. 한 명이 극을 이끌지만, 돋보이는 것보다 온전히 책임지는 게 크거든요. 도망 갈 곳도, 숨을 곳도 없어요. 모노드라마를 떠올린 것도 더 공부하고 생각하고 싶어서예요. 가장 힘이 좋을 때 무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은 있어요.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다 늙어서 가는 게 아니라 밀알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죠.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눠보니 책임감이 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진 못했어요. 근데 맞는 것 같아요. 20대부터 저는 역할보다 작품을 먼저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배들이나 연출가들이 그랬어요. “너는 네 역할이나 열심히 하지, 왜 모든 걸 다 책임지려고 하느냐”고. 어떤 작품을 할 때도 첫 콜을 받으면 매니저에게 따지지 말고 그냥 하자고 해요. 그리고 절대로 늦게 가지 않아요. 무조건 20분 전에 도착하죠.

오늘도 촬영장에 일찍 오셨죠. 근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책임감이 있나’라는 걸 지금 처음 떠올렸어요. 그냥 저만의 방식인 것 같아요.

에디터 김지수 사진 김민주 헤어 & 메이크업 정지은 스타일링 이우민 디지털 에디터 함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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