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세완
이제 막 움튼 박세완 스토리.
오늘 촬영은 ‘94즈’가 이끌었습니다. 모델도, 포토그래퍼도, 에디터도 모두 1994년생이에요.
그렇다면서요. 같은 개띠라 그런지 더 편했어요. 혹시 두 분 MBTI 앞자리가 뭐예요?
‘E’예요. 저와 포토그래퍼 모두.
에, 거짓말! ‘두 분은 당연히 I일 거다’ 생각했거든요.(웃음)
세완 씨 MBTI는 여전히 INFJ로 나오나요?
네, ‘E’처럼 보이죠? INFJ가 원래 좀 그래요. ‘내향인 중에서는 가장 외향적인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만 요즘처럼 바쁠 때는 거의 집에만 있어요.
요즘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넉오프> 촬영 때문에 많이 바쁘죠?
맞아요. 8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요. 영화 <빅토리> 홍보 활동이 끝나자마자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강매강(강력하진 않지만 매력적인 강력반)> 홍보와 <넉오프> 촬영을 이어가고 있어요. 그래도 작품 활동이 끊이지 않는 건 감사하죠.
<강매강>을 기다리는 팬 중 한 명입니다.
정말요? 방영일까지 일주일밖에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참아주세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지금 대본을 다시 읽어봐도 마음에 동이 튼다니까요.
프롤로그에 적힌 ‘서민서’의 특징은 ‘다혈질 형사, 털털하다’였어요. 세완 씨와 비슷한 부분이 있나요?
‘서민서’처럼 감정적으로 쏟아붓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저도 털털한 편이에요. 마침 (배역의) 나이도 30세니까 딱 비슷하고요.
배역 연구 중 가장 고심했던 건 뭐예요?
흔히 ‘여자형사’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요. 머리카락은 짧고, 가죽 재킷을 입고, 목소리는 걸걸한. 그런 전형적인 기준에서 탈피하고 싶었어요. 감사하게도 감독님이 그 제안을 받아주셨고요. 털털하더라도 귀여운 걸 좋아할 수 있잖아요. 가방에 인형을 달 수 있고, 핑크색 수첩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죠. 그런 식으로 조금씩 비트는 걸 좋아해요.(웃음)
김동욱, 박지환, 서현우 등 함께 촬영한 배우들이 쟁쟁합니다.
어유, 한 작품에 모여 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동경하는 선배들인 만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합류하고 싶었어요. 지환 오빠 작품은 다 봤고, 현우 오빠는 <유령>으로 입문하고 팬이 됐어요. 동욱 오빠는 말해 뭐해요. 옛날부터 꼭 한번 뵙고 싶던 선배인데 함께해서 영광이었죠. 제가 어릴 때부터 웬만한 드라마는 거의 다 봤거든요. 아마 지금보다 더 애착이 컸을 거예요. 3사 드라마를 월·화·수·토·일요일에 걸쳐 다 챙겨 봤는데, 줄거리가 헷갈려서 공책에 필기한 적도 있어요.(웃음)
연기예술학과를 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음, 사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당시에는 현실적으로 성적이 맞는 학교와 전공을 선택해야 했거든요. 근데 전혀 흥미 없는 공부를 4년이나 하고 싶지는 않은 거예요. 그래서 예체능 쪽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음악, 미술은 아닌 것 같아서 연기 학원에 다녀보기로 한 거죠.
질리지 않는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어차피 나는 이 일을 오래도록 할 거니까,
빛나는 배우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물 흐르듯 이어갈 수 있는 배우가 될래요.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이었군요.
맞아요. 거기서 (연기에 대한) 승부욕을 느낀 건 천운이에요. 제 성격이라면 진작에 그만뒀어야 했거든요. 그때는 연기가 재밌었다기보다는 그저 선생님께 칭찬받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부모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준비할 정도로.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나요?
말도 마세요. 가벼운 마음으로 학원만 다니는 줄 알았는데, 입시 때문에 서울 간다고 하니 엄청 반대하시더라고요. 용돈 받는 카드를 정지시킨 적도 있어요. 정시에 응시하려면 비용이 들잖아요. 그 돈도 못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선생님께 빌려서 냈어요. 지금은 그때 일에 대해 무척 미안해하세요.(웃음) 처음 연극 무대에 섰을 때 부모님을 관객석에 초대했는데,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때부터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됐어요. 지금은 부산 본가에 그동안 받은 상, 대본, 선물까지 다 정성스럽게 진열해놓을 정도예요. 다행이죠.
참, 예전에 인터뷰에서 이런 답변도 했죠? 슬픈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어머니 편지를 촬영장에 갖고 가서 읽었다고.
아마 주말 드라마 <두 번은 없다>를 촬영할 때였을 거예요. 사실은 작품 속 역할을 역할로만 봐야 하기 때문에 그런 장치를 현장에 잘 안 가져가는 편이거든요. 근데 그때는 쉽지 않더라고요. 거의 매일 우는 장면을 촬영해야 하는데 죽어도 눈물이 안 나오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일부러 술도 마시고, 엄마 편지도 보고 그랬죠. 마침 ‘금박하’가 엄마 역할이었기 때문에 감정을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이젠 무엇을 어떻게 이뤄낼 거다,
이런 결론은 없어요
큰 욕심 없이 단단하게.
그렇게 걷다 보면 중요한 것만
남을 것 같아요.
주말 드라마 촬영이 그렇게 힘들다면서요? <두 번은 없다>는 총 72부작이니 얼마나 숨 가빴을까 싶네요.
힘들었지만, 그만큼 큰 경험이 됐어요. 무엇보다 선배님들과 함께한 시간이 소중했거든요. 신인 때 그런 기회가 있었다는 점에 감사해요. 그런 부분에서 <땐뽀걸즈>도 소중한 작품이에요. 저는 원래 감정 표현에 무딘 편이거든요. 그래서 늘 우는 연기가 힘들었어요. 근데 이 작품을 하면서 비로소 제 감정을 만난 것 같아요. 감독님과 선배들이 있는 그대로 감정 표현 하길 원했고, 본능대로 소리치면서 싸우고, 욕하고, 울면서 연기할 수 있었어요. 엄마 역할인 김선영 선배님과 리허설도 없이 싸우던 신이 지금도 기억나요. ‘상대 역과 이렇게 호흡하고 이렇게 받는 거구나’, ‘나한테 이런 모습이 있구나’라는 것도 조금씩 깨달으면서 감정 연기가 더 이상 어렵지 않더라고요.
이번 <빅토리> 속 ‘장미나’를 보면서 약 5년 전 <땐뽀걸즈>의 ‘김시은’을 떠올리는 분이 많더군요. 작품을 준비하면서 겹쳐 보이지 않기 위해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많았죠. 근데 그건 겹쳐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캐릭터의 100%를 채우기 위한 고민의 시간이었어요. 저는 작품 촬영보다 준비하는 과정에 더 힘을 쏟아요. 혼자 산책하면서 그 캐릭터의 걸음걸이나 말투, 제스처 등 사소한 것들을 고민하죠. 이번 <빅토리> 속 ‘장미나’를 예로 들면 딱풀로 앞머리를 누르고 브리지 컬러를 넣은 것, 주머니에 손 넣는 습관도 그런 고민의 결과였어요.
앞서 <강매강> 속 ‘서민서’를 재해석한 방식처럼요?
맞습니다.(웃음) 작중 ‘장미나’가 ‘추필선’(혜리)에게 “니 옆에서 조연이라도 된 거 같아서 늘 좋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장미나는 춤추는 것보다 친구와 놀면서 도와주는 걸 좋아했던 게 아닐까? 이렇게 파고들면 배역이 존재하는 이유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늘 대본 읽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져요.
필모그래피를 보니 공백기가 거의 없더라고요. 슬럼프는 없었는지 궁금해요.
슬럼프보다는 번아웃이 온 적 있어요. ‘부지런히 살면 그게 다 연기 활동에 보탬이 될 것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쉬지 않고 달려왔거든요.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 스스로를 한가운데 몰아넣고 살았어요. 근데 살다 보면 원하는 결과만 나오지는 않잖아요. 기대했던 것보다 내 성과가 낮을 때 오는 허탈감이 크더라고요. 그때 힘들었어요. 아니, 힘들다기보다는 힘을 내고 싶지 않았죠. 작품 속 내 모습도 못나 보이고.
번아웃을 이겨낼 수 있었던 계기는요?
문득 유튜브에 제 이름 ‘박세완’을 쳐봤어요. 다양한 작품이 좌르륵 나오더라고요. 그중엔 시청률이 낮은 작품도 있었고요. 클릭해서 보는데 ‘나 정말 열심히살았구나’ 싶은 거예요. 그때 후회했죠. 왜 단점만 봤을까. 이렇게 치열하게 달려오고 성장해왔는데. 나보다 잘된 친구만 보지 말고 내가 걸어온 길을 봐야겠다 싶었어요.
내가 걸어온 길을 봐야겠다는 말, 참 따뜻하게 느껴져요.
감사합니다.(웃음) 이젠 뭔가를 하더라도 온전한 나를 위한 이유를 찾으려고 해요. 운동을 해도 내가 좋아서 하는 거고, 내가 건강해지기 위해 하는 것처럼요. 요즘은 집에서 청소한 뒤 한가롭게 앉아 있는 시간이 가장 좋아요.
예전에는 안 그랬나요?
네. 주위에서 그렇게 재미없게 살면 배우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거예요.(웃음) 배우는 성격도 세고 술도 잘 마셔야 하는데, 너는 거리가 멀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차분한 저를 부정하며 살아왔죠. 지금은 달라요.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요.
있는 그대로의 세완 씨는 어떤 사람인가요?
음, 저는 캐릭터가 강한 사람은 아니에요. 귀여운 사람도, 섹시한 사람도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고 잘 노는 것도 아니니까 어딘가 무딘 사람처럼 보일 수 있죠. 그래도 강점을 꼽자면, 질리지 않는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어차피 나는 이 일을 오래도록 할 거니까, 빛나는 배우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물 흐르듯 이어갈 수 있는 배우가 될래요.
‘물 흐르듯 이어간다’, 배우에게 그보다 좋은 수식어는 없겠어요.
제 생각도 그래요. 지금 딱 서른 살인데, 시간이 지나면 김선영·염정아 선배처럼 자연스럽게 엄마 역할로 넘어가고 싶어요. 그렇게 연륜이 쌓이면서 윤여정 선생님처럼 끊임없이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소원이에요. 그분처럼 먼 미래에도 쭉 연기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결국 세완 씨만의 정답을 찾았군요.
맞아요. 이젠 무엇을 어떻게 이뤄낼 거다, 이런 결론은 없어요. 큰 욕심 없이 단단하게. 그렇게 걷다 보면 중요한 것만 남을 것 같아요.
검지와 약지에 낀 링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른쪽_ 아워글래스 레더 재킷과 스커트 모두 Versace,
펌프스 힐 Dolce&Gabb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