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스타의 꿈을 꾸게 한 결정적 장면들
나를 무대 위로 이끈 한 장면, 한 울림.
헤비메탈과 하드록을 중심으로 한 올드 록의 거장들이 하나둘 무대를 떠나고 있다. 오지 오스본, 에이스 프렐리처럼 한 시대를 상징하던 아이콘의 퇴장은 누군가의 삶을 음악으로 이끈 ‘첫 장면’ 역시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번 칼럼은 그 기억을 다시금 불러낸다. 네 명의 록 아티스트에게 처음으로 가슴을 울렸던 무대를 묻고, 그 순간이 지금의 음악과 무대 태도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따라간다. 기타를 들게 만든 장면, 사운드의 방향을 정한 시점, 무대라는 개념을 처음 인식한 순간까지.

관객 없는 무대에서 배운 록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집에 비디오플레이어가 처음 생겼을 때다. 어느 날 아버지가 핑크 플로이드의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사 오셨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관객 없이 연주하는 영상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테이프를 중학생 시절 거의 매일처럼 재생했다. 공연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지는 영상이었다. 첫 곡은 ‘Echoes Part 1’. 기타와 피아노가 공간을 천천히 채워가는 그 도입부를 수없이 따라 연주했다. 테크닉보다는 구조, 소리의 흐름과 여백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언젠가 이들 같은 밴드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과시하기보다는 소리로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밴드.
어느 날 밤에는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공연하는 꿈을 꿨다. 데이비드 길모어 형님과 나란히 서서 기타를 연주하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저 꿈이라기보다는, 나에게 내려진 계시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음악을 계속 해도 되겠다는 확신, 혹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의무적 감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공연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과 ‘Comfortably Numb’을 연주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선택이지만, 그때는 꼭 해보고 싶었다. 기타 이펙트는 하나도 없어서 친구들이나 형들에게 이것저것 빌려 썼다. 핑크 플로이드는 음악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밴드였다. 곡 안에서 사운드가 어떻게 전개되고, 밴드라는 형태가 어떻게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동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도 폼페이의 그 무대를 떠올린다. 관객이 없었기에 오히려 더 명확해진 소리, 그리고 밴드라는 형식. 내게 ‘록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처음으로 답이 된 장면이었다. _ 신윤철
신윤철 밴드 서울전자음악단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프로듀서, 음악감독. 사이키델릭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 전자음악의 문법을 결합해 한국 대중음악 안에서 독자적 사운드 세계를 구축해왔다. 구조와 질서를 중시하는 작곡 방식과 공간감을 살린 기타 사운드, 정교한 음향 설계는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특징이다. 한국 록의 거장 신중현의 아들로 태어나 음악이 일상처럼 존재하던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그 영향 위에 자신만의 미학과 실험성을 더해왔다.
몬터레이에서 기타가 불타던 순간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비틀스를 통해 음악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던 시기, 지미 헨드릭스의 1967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 라이브 영상을 보게 됐다. 화면으로 접한 공연이었지만, 그 순간을 기점으로 나는 음악가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떤 계기라기보다는, 삶의 방향이 또렷하게 정해지는 경험에 가까웠다.
지미 헨드릭스는 1960년대 록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뮤지션이고,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은 그의 첫 미국 데뷔 무대였다. 작렬하는 퍼즈톤 기타 사운드, 곡예처럼 이어지는 스테이지 액션, 그리고 공연의 끝에서 기타에 불을 붙이고 파괴하며 맞이하는 피날레까지. 오래전 영상인 데다 직접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공연의 매 순간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처음 그 무대를 볼 때는 모든 것이 우연처럼 느껴졌다. 기타를 휘어 누르는 밴딩과 등 뒤로 넘겨 치는 연주, 몸짓과 표정까지 동원해 소리를 밀어붙이는 방식, 스피커 하울링과 이로 연주하는 장면들까지. 즉흥적 해프닝이 연속되는 무대처럼 보였고,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가 그대로 분출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그 모든 장면이 계산되고 의도된 퍼포먼스였다는 걸 알게 됐다. 이미 머릿속에 큰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해낸 무대였다는 느낌이 든다.
그 경험은 이후 내 음악 스타일을 규정한 결정적 순간으로 남아 있다. 가감 없는 퍼즈톤 기타 사운드, 몸을 던지는 스테이지 액션,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해온 야성의 미학. 지금 내가 무대 위에서 추구하는 많은 것이, 그날의 몬터레이에서 이미 형태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데뷔 후 지금까지 수많은 무대에 섰지만, 모든 공연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럼에도 남은 바람이 있다면, 연말에 열리는 ‘차승우와 사촌들’의 무대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첫 장면’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크라잉넛의 한경록, 위아더나잇의 릴피쉬, 리셋터즈의 클레어 제이,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김간지까지. 인디 록 신의 여러 세대와 장르를 가로지르는 뮤지션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 무대가 누군가를 다시 음악으로 향하게 만드는 계기이자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올드 록 거장들이 하나둘 무대를 떠나고 있지만, 그 시대의 감각과 유산은 어떤 모습으로든 계속 전승될 거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시대가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_ 차승우
차승우 한국 펑크 록 신을 대표해온 보컬이자 기타리스트. 밴드 더 문샤이너스와 노브레인을 통해 강렬한 라이브 퍼포먼스와 직선적 사운드로 이름을 알렸으며, 무대 위에서 몸을 던지는 태도로 록의 야성을 각인시켜왔다. 펑크와 하드록의 감각을 자신만의 언어로 소화해온 그는 현재 ‘차승우와 사촌들’이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통해 인디 록 신의 여러 세대와 장르를 잇는 무대를 준비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과잉의 기준이 된 무대
록은 늘 과잉 상태에 위치한다고 믿는다. 무대도, 소리도, 감정도 어느 정도는 넘쳐야 한다. 그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에서 왔다. 1994년 가을, 제1회 톰보이 록 콘테스트.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그날 N.EX.T(이하 ‘넥스트’) 무대를 통해 이후 어떤 공연과 비교해도 기준이 되는 순간을 처음 마주했다. 그해 나는 우여곡절 끝에 학교 록밴드에 들어갔고, 마침 선배들이 톰보이 록 콘테스트에 출전하게 됐다. 덕분에 난생처음 록 공연을 보게 됐다. 그것도 클럽이나 소극장이 아닌, 실내체육관을 가득 채운 대형 무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연을 봤다’기보다는 록이라는 음악이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물성을 처음으로 체감한 날이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무대는 노이즈가든이었다. 강렬한 사운드, 마이크 스탠드를 바닥에 내려치는 과감한 퍼포먼스까지. 록 공연이 얼마나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는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을 완전히 붙잡은 건, 게스트로 등장한 넥스트의 무대였다. 좌석은 무대와 상당히 떨어져 있었고, 대형 스크린 같은 장치도 없던 시절이라 연주자들의 얼굴이나 손짓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어렴풋이 화려한 의상이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대신 공연장을 가득 채운 소리의 밀도는 지금도 또렷하다. ‘이중인격자’에서 들린 신해철 형님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충격이었고, 무엇보다 해머로 가슴을 내려치는 것 같은 베이스 소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았다.
당시에는 무대의상도, 사운드도 과하다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떠올려보면, 그 과잉이야말로 록이라는 장르의 본질에 가장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경연 팀에 비해 유독 큰 소리, 끝까지 밀어붙이던 연출. 아마 사운드 엔지니어 역시 넥스트 무대에는 다른 효과를 적용했을 것이다. 결국 록은 과잉의 음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의 넥스트 무대는 완벽한 록 공연이었고, 외국 밴드를 포함해 이후 어떤 공연보다 강렬했다.
그 경험은 내 음악 취향과 태도에 깊게 남아 있다. 찌르는 듯한 고음보다는 배음이 깔린 두꺼운 고음을 선호하게 된 것도, 곡을 만들 때 자연스럽게 베이스를 먼저 떠올리게 된 것도 모두 그날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내 무대 중 누군가에게 ‘첫 장면’으로 남길 바랄 만한 공연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부족함이 먼 저 떠오른다. 많은 분이 KBS2 프로그램 에 출연한 모습을 기억해주시지만, 나는 오히려 부끄러워 다시 보지 못할 정도였다.
올드 록 거장이 하나둘 무대를 떠나는 지금, 뮤지션 개인의 이름은 언젠가 잊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지 오스본도, 데이비드 커버데일도 내게는 이미 이전 세대의 음악가였고, 비틀스 역시 시간이 지나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소리는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재현한 그리스·로마 예술처럼, 언젠가 또 다른 세대의 선택을 받을 것이다. 그 흐름 속에서 내가 작은 마중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_ 박근홍
박근홍 밴드 게이트플라워즈 보컬. 두꺼운 사운드와 밀도 높은 보컬을 중심으로 얼터너티브 록과 헤비 록의 미학을 자신만의 언어로 구축해온 음악가다. 지난 3월, 밴드 왓!(What!)의 기타리스트 이상훈 및 베이시스트 장민규, 밴드 아프리카의 드러머 장민규와 함께 언더독(UNDERDOG)을 결성해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무대 이전의 록에 관하여
실제 공연을 보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자극을 받은 기억은 크게 없다. 대신 비디오를 통해 음악을 먼저 접했다. 영국 밴드 더 후의 〈The Kids Are Alright〉 영상이 그 출발점이었다. 화면 속에 남아 있던 그들의 태도와 소리를 보며, 막연하게 1960~1970년대 뮤지션들을 동경했다.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장면은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센드의 연주다. 팔을 크게 휘두르며 기타를 치다가, 마지막에 악기를 부수는 장면까지. 그 모습은 과격함보다는 오히려 음악과 몸이 완전히 하나로 이어진 상태를 보여주는 듯했다. 연주가 끝난 뒤 무엇을 남기기보다는 그 순간의 에너지를 모두 써버리는 태도였다. 그 장면은 이후 내가 록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오래 남아 있었다. 집에서 기타를 연습하던 어느 날, 친구들이 “너 일렉 기타 있다며?” 하고 말을 건넸다. 자연스럽게 밴드를 결성했고, 곧바로 학교 축제 무대에 올랐다. 순서로 치면 조금 특이한 시작이었다.
이후 1960년대 음악을 더 찾아 들었고, 관심은 자연스럽게 1970년대 음악으로 이어졌다. 벨벳 언더 그라운드의 음악과 이미지, 밴드 텔레비전이 만들어낸 긴장감 있는 사운드도 그렇게 접했다. 이들의 음악에는 과시적 연주가 아닌 톤과 여백, 밴드 전체의 호흡이 더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기타는 앞에 나서는 게 아니라 곡 안에서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한다. 특히 밴드 텔레비전과의 인연은 이후 2013년, 장기하와 얼굴들 활동 시절 합동 공연으로 이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1970년대 음악의 한 축과 같은 무대에 서서 연주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분명한 의미로 남아 있다. 기타리스트 톰 벌레인이 보여준 섬세한 핑거링과 함께 같은 눈높이에서 연주하고, 공연이 끝난 뒤 음악 이야기를 나누던 그 감각은 지금도 또렷하다.
섹스 피스톨즈 역시 이 흐름 안에서 좋아하게 된 밴드였다. 〈God Save The Queen〉 뮤직비디오에서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가 들고 있던 기타가 유독 인상에 남았다. 결국 처음으로 큰돈을 모아 1983년식 흰색 깁슨 레스폴 커스텀을 샀다. 그 기타는 소리 자체보다는 섹스 피스톨즈의 태도를 동경한 선택이었다. 거칠고 직설적인 연주, 꾸밈없는 사운드는 내가 바라던 1960~1970년대 음악의 감각과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 예전의 영상과 공연을 다시 떠올리면,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지점이 보인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마음 한편이 차분해야 하고, 화려한 연주보다 인상적인 톤과 여음을 만드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 실수를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연주를 이어가는 태도 역시 록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도 알게 됐다. 1980년대 이전 록 음악은 이제 직접 마주할 수 있는 무대와 인물이 대부분 사라졌고, 그들이 남긴 유전자 또한 점점 옅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음악이 남아 있는 한 그 시대의 감각은 다른 방식으로 계속 호명될 것이다. _ 하세가와 요헤이
하세가와 요헤이 일본 출신 기타리스트. 1995년 일본 최초의 한국 록 전문 밴드 ‘곱창전골’을 결성했다. 황신혜밴드, 뜨거운 감자, 김창완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등에서 연주했다. 톤과 여백을 중시하는 연주로 밴드 사운드의 균형을 만들어왔으며, 영화 〈사생결단〉 음악 프로듀서로도 활동했다. 2023년에는 저서 〈하세가와 요헤이의 도쿄 레코드 100〉을 통해 레코드 컬렉션을 소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