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와 작품 사이의 얼굴들
배우 윤가이가 그리는 새로운 얼굴들.

요즘 방영 중인 MBC 드라마 <메리 킬즈 피플> 속 ‘최예나’ 가 화제예요. ‘우소정’과 함께 조력 사망 사업을 돕지만 속내가 쉽게 읽히지 않는, 어딘가 미스터리한 기운을 지닌 인물이죠. 맞아요.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캐릭터예요. 단순히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거든요. 늘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 두려움과 절박함이 남아 있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연기할 때도 표정과 대사의 결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려고 했어요.
그런 예나와 닮았다고 느낀 점이 있다면요? 장녀라는 점이요. 저도 남동생이 있고, 부산 출신이라 예나의 감정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장녀로서 느끼는 책임감, 가족을 위해 기꺼이 감정을 억누르는 습관이 닮았죠. 그래서인지 촬영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이 친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늘 있었거든요.
9월 중순까지 방영한다고 들었어요. 촬영은 끝난 거죠? 네. 올해 초에 끝났고, 지금은 새로운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 시즌 2> 촬영에 돌입했어요. 체력적으로 쉽진 않지만, 하루하루 행복한 마음이 커요.

쿠팡플레이 <SNL 코리아>에 참여한 이후 연기 활동이 부쩍 많아졌네요. 크루 출신 중 가장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크루) 선배들의 힘이 컸죠. 이미 방송계에서 오래 호흡을 맞춰온 선배들이 있었고, 그 속에서 제가 자연스럽게 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어요. 후배 입장에선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덕분에 저도 드라마 촬영 때마다 편안하게 몰입할 수 있었죠.
드라마 제작진이 왜 윤가이라는 배우를 선택했다고 느끼나요? 음, 아마 속 제 모습을 보고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과 잘 어울리고 호흡을 맞추는 사람이라고 느낀 게 아닌가 싶어요. 연기라는 것이 혼자 잘하기보다 함께하는 사람들과 유연하게 어우러지는 게 중요하잖아요. 크루들과 케미가 좋으면 작품 안에서도 안정적으로 녹아들 거라고 생각하셨을 거고요. 그게 관계자분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SNL 코리아>에 임하기 전과 비교할 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예전엔 소속사도 없고, 오디션도 많이 보러 다녔어요. 제가 그 배역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 사람인지 보여주고 하나하나 증명해야 했죠. 그런데 이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가능성을 먼저 알아봐 주시더라고요. 참 감사한 일이죠.

좋은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연기자로서 포부같은 것도 생겼나요? 기회를 주신 만큼 그걸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커졌어요. 단순히 연기만 잘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죠. 그래서 사적으로도, 일적으로도 동료들과 자주 소통하며 촬영하고 있어요.
<SNL 코리아>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분했잖아요. MZ 오피스 ‘기존쎄’도 있었고, ‘16기 영숙’도 있었죠. 그중 가장 실험적인 캐릭터는 뭐였어요? 아무래도 ‘MZ 오피스’ 캐릭터가 아닐까요. <SNL 코리아>에 합류한 뒤 처음 맡은 배역이거든요. 정이랑, 이수지, 지예은 선배 등 이미 완벽하게 호흡을 맞춘 팀에 새로운 캐릭터로 들어가는 건 정말 긴장되는 일이었어요. 팀 컬러에 안 어울리면 어쩌나 걱정도 많았고요.
당시 방송에서 본 발랄한 이미지와 실제 모습은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그런 말 많이 듣죠? 네. 차분하고 조용한 편이에요. ‘MZ 오피스’ 편을 포함해 에서 맡은 캐릭터 이미지와는 거리가 좀 있죠.(웃음) 무대에 처음 섰을 땐 주변 사람들도, 저 자신도 놀랄 정도였어요.
정반대 캐릭터지만, 도전할 수밖에 없었군요. 맞아요. 살면서 꼭 잡고 싶은 기회였어요. 처음엔 긴장도 많이 했지만, 막상 촬영장에 가보니 긴장감마저 즐겁더라고요. ‘아, 이건 놓치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 후로는 부담보다 도전에 대한 기대가 훨씬 커졌어요.
그런 도전이 실제 성격에도 큰 변화를 줬을 것 같은데요. 그간 못 보여준 모습을 조금 더 편하게 꺼낼 수 있게 됐어요. 배역을 수행할 때의 에너지가 스스로를 더 과감하게 만들었다고 할까요. 이젠 자신감이 생겼죠.

부산 문현여자고등학교 연극부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SNL 코리아>에서 활약한 모습과도 어쩐지 연결되는 것 같아요. 관객들과 호흡하는 형식이니까요. 맞아요. 무대와 방송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 만큼 고등학생 때 연극부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무대에 서면 관객의 숨소리나 작은 웃음까지 느껴지잖아요. <SNL 코리아>에서도 그 감각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걸 느끼곤 해요.
그렇다면 처음 연기를 접한 건 고등학생 때였나요? 아니에요. 중학생 때 길거리에서 아역 전문 에이전시 명함을 받은 게 계기였어요. 원래는 성격을 조금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본래 말도 서툴고 조용한 편이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 에이전시가 연기 학원도 병행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당시 처음 연기를 접하며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느끼는 설렘을 알게 됐어요.
그다음이 문현여고 연극부였군요. 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연극부 오디션을 봤어요. 그때부터는 ‘이걸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죠. 처음 무대에 오르던 순간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해요. 다른 친구들이 학업에 열중할 때 저는 연극부 활동에 열정을 쏟아부은 것 같아요.
당시 같은 연극부였던 조유리 씨 얘기도 빼놓을 수 없죠. 지난번 인터뷰 때 가이 씨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거든요. 멘토처럼 잘 대해줬다고. 아, 정말요?(웃음) 유리는 1학년 때부터 워낙 잘하는 친구였어요. 연습 태도도 성실하고, 표현력도 좋아서 선배들이 예뻐했죠. 당시 마지막 연극에서 함께 주인공을 맡았는데, 서로 많이 의지했어요. 공연 준비하면서 눈빛만 봐도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었거든요. 지금도 그 시절 얘기를 하면 서로 고맙다고 해요. 저도 유리를 보면 고등학교 무대가 떠오르고. 아마 유리도 그럴 거예요.
인연이 깊네요. 당시 연극부 분위기는 어땠나요? 굉장히 끈끈했어요. 학년이 달라도 서로 챙겨주고, 무대 위에서 주고받는 에너지를 아낌없이 나누는 분위기였죠. 신기하게도, 그 시절의 공기가 아직 제 안에 남아있는 것 같아요. 가끔 현장에서 동료들과 호흡을 맞출 때도 연습실에서 함께 대사를 나누던 그 시간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거든요.
연기에 대한 회의감은 없는 편인가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늘 즐거워요.(웃음) 제가 다른 일에는 걱정이 많은데, 연기만큼은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거의 없어요. 잘 되든 안 되든, 제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니까요. 그 안에서 부딪히고 실패해도 다시 해보자는 마음이에요.
그만큼 현장에서 버티게 해주는 힘이 필요하겠네요. 맞아요. 저는 그 원천이 ‘체력’이라고 생각해요. 체력이 있어야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친절할 수 있고, 상대방 기분도 세심하게 살필 수 있거든요. 몸 상태가 좋을 때는 연기도 자연스럽게 풀리는데, 그렇지 않을 땐 제 스스로 격차가 느껴져서 답답해요. 그래서 항상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죠. 영양제에도 관심이 많은데, 요즘 마그네슘을 챙겨 먹고 있어요.(웃음)

바쁜 일정 중에도 소소한 즐거움은 챙기고 있나요? 그럼요. 요즘은 해 지기 전에 퇴근하는 날이 가장 행복해요. 오후 5~6시쯤 촬영을 마치고 스태프 친구들과 차 안에서 노 을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하는 그 순간, 하루의 피로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생각에 잠기며) 아, 넷플릭스 시리즈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에 꽂혀서 챙겨 보고 있어요.(웃음) 혼자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고요.
독립영화 마니아 같던데, 평소 즐겨 보는 영화가 궁금했어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보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가족 이야기를 좋아해요. 최근에는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 봤는데, 여름 특유의 공기와 섬세한 감정들이 오래 남더라고요.
배우로서는 주로 어떤 이야기를 선호하는 편인지. 처음과 끝이 달라지는 인물, 사건을 겪으면서 마음이나 환경이 변하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껴요. 최근 드라마 <또 오해영>을 다시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해영이가 변화한 만큼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인물이 끝내 행복해지는 과정을 함께하고 싶은 거죠.
변화의 여지를 지닌 인물에게 더 끌리는군요. 맞아요. 변화 혹은 성장을 연기하다 보면 저도 과정에 스며드는 기분이 들어요. <메리 킬즈 피플>의 ‘최예나’도 그런 특별한 서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좋았어요.
캐릭터를 준비할 때 쓰는 나만의 방식 같은 게 있나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이해하려기보다 촬영하는 동안 ‘이 배역과 잘 지낸다’고 생각해요. 찍다 보면 중간에야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배역과 잘 지낸다라, 각별한 만큼 헤어질 때 아쉬움도 크겠어요. 아무래도 그렇지만, 그다음 배역과의 만남이 있으니 슬픔은 덜한 것 같아요.(웃음) 그렇게 계속 다시 캐릭터에 빠지는 거죠. 좋은 자극제가 돼요.
SNS 계정 프로필을 보니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던데, 기록으로 남기는 편인가요? 네.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 날짜를 정해두고 꼬박꼬박 올렸는데, 요즘은 숙제처럼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해요. 마음이 동할 때,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때만 글을 게시하죠.
연기와 글쓰기는 또 다른 표현 방식일 텐데, 비슷한 점도 있나요? 있는 것 같아요. 글을 쓰다 보면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선명하게 드러나거든요. 연기도 비슷해요.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제 마음이 그 안에 투영돼요. 그래서 이따금 글을 쓰는 건 저를 배우로서도, 한 사람으로서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인 것 같아요.
좋은 기억법이네요. 다음에 만나게 될 윤가이라는 배우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한 가지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고 ‘이런 모습도 있었네’ 하고 새로운 면을 계속 보여줄 수 있는 배우였으면 해요. 그래서 최대한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에 도전하고 싶어요.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더 깊어진 배우가 되어 있길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