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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이라는 야생화

마침내 꽃피우다.

재킷과 셔츠, 팬츠 모두 Gabriel Lee.

한동안 꽃을 피우기 위해 열심히 땅을 준비했는데 갑자기 야생화라고 하니까,
어느 순간 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는 생각에 감격스러웠어요.

최근 종영한 <천원짜리 변호사>로 호평받았어요. 인기를 실감 하나요?

바빠진 스케줄로 ‘인기가 조금은 많아졌구나’ 하고 체감해요. 그리고 거의 없었는데, 부모님이나 지인들의 사인 요청이 많아졌어요. 간혹 화장을 안 해도 알아봐주고요. 머리 붙여서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백시보!” 이러면서.

무명 생활이 꽤 길었는데, 이제 빛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 모습이 마치 야생화 같았고요. 강인하면서도 아름다운 야생화. 자신과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나요?

처음 시안을 받았을 때 콘셉트를 보고 놀랐어요. 나보다 나를 더 잘봐준 느낌이라. 예전에 제 카톡 대화명이 ‘꽃피울 수 있는 땅’이었거든요. 대학생 때 교수님께 들은 말인데, “누구나 빨리 꽃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꽃을 피우려면 비바람과 눈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땅부터 다져놓아야 한다”라고. 그 말씀을 듣고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동안 꽃을 피우기 위해 열심히 땅을 준비했는데 갑자기 야생화라고 하니까, 어느 순간 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는 생각에 감격스러웠어요.

드라마뿐 아니라 뮤직비디오부터 광고, 독립 영화까지 여러 방면에서 다작을 해왔어요. 원래 워커홀릭인가요?

워커홀릭인지 몰랐는데, 일할 때 가장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아요. 감사하게도 일을 계속 해왔는데,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늘 즐거웠어요.

화이트 셔츠와 블랙 타이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백마리 역의 칼단발 헤어스타일이 화제였는데, 긴 머리도 잘 어울리네요.

맞아요. 그래서 걱정했어요. ‘머리 붙이면 못 알아보거나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하고. 다행히 먼저 본 주변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저도 색다른 느낌이 들어 만족해요.

왜 스타일에 변화를 준 건지.

백마리가 너무 강한 이미지라 그걸 조금 깨려는 것도 있었고, 차기작에서 맡은 역은 자기 관리를 철
저히 한다기보다 ‘머리를 기르거나 파마를 하면 예뻐 보이겠지’ 생각하는 털털한 친구라 긴 머리로 스타일을 바꿨어요.

얼마 전 <런닝맨>에 출연했어요. 평소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고.

인터뷰할 때마다 <런닝맨>에 나가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걸 제작진이 보셨더라고요. 나가기 전에 너무 떨리고 긴장됐는데, 다들 원래 알던 사람처럼 잘 챙겨줬어요. 역시 원년 멤버의 호흡은 다르더군요. 만약 불편했으면 저도 쭈뼛쭈뼛 말도 잘 못했을 텐데, 정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어요. 마지막 미션을 할 때쯤은 평소 자주 보던 사람들처럼 말을 섞고 있었어요. 속으로 ‘여기 진짜 이상한 곳이다. 이렇게 편해진다고?’ 생각했죠

블랙 드레스 Rokh.

MBTI가 ENFJ라서 그런지 긍정적이고 쾌활한 성격인 것 같아요. 자신의 성격이 연기 활동이나 삶에 주는 이로움이 있나요?

제가 ENFJ 아니면 ESTJ가 나오는데요. 마냥 긍정적인 성격은 아니고, 냉정할 때도 많아요. 밝은 모습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진 않나 봐요. 다가가기 쉽고 소통하는 데 있어 편한 편이에요.

한 인터뷰에서 악플이 신경은 쓰여도 영향을 크게 받진 않는다고 했어요. 원래 내면이 단단한 편인지, 후천적으로 변한 건지.

단단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에요.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도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고요. 정작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데,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휘둘리다 보면 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더라고요. 조언해주는 댓글은 받아들이지만, 악의적인 댓글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아요. 얼마 전 엄마한테 전화가 왔는데, 우시더라고요. 안 좋은 댓글을 보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엄마 같은 사람 보라고 그렇게 쓴 거야 울지 마, 연연해하지 말고”라고 했어요.

그게 노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대단하네요.

저도 처음엔 잘 안 됐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대학 다닐 때 저를 안 좋아하는 사람에게까지 사랑받기 위해 애쓴 적이 있어요. 도리어 가까운 친구에게 소홀했죠. 서운해하던 친구가 “그러다 나까지 잃어”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때 ‘그러게.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표현하기도 아까운 시간인데’ 하면서 변한 것 같아요

코튼 소재 재킷과 팬츠, 인트레차토 위빙의 나파 소재 펌프스 모두Bottega Veneta.

팬데믹이 심할 땐 취미로 디퓨저를 만들고 베이킹을 하는 등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고 하던데, 요즘은 쉴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요즘은 쉬는 날이 생기면 정말 쉬어요. 그나마 활동이라면, 운동하거나 대본을 봐요. 아니면 맛있는 음식 시켜놓고 노트북으로 <나는 솔로>, <환승 연애>등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놔요. 드라마를 보면 저도 모르게 한두 번씩 ‘왜 저건 저렇게 표현했을까’ 공부를 하게 되더라고요.

표정 연기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표정 연구를 따로 하나요? ‘

어떻게 지어야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방해가 돼서 따로 공부하진 않았어요. 성격이 급해서 연기할 때도 뭔가 계속 표현하려는 게 단점이죠. 캐릭터가 기쁜 상태면 ‘기쁜 거 티 안 났겠지’라는 생각으로 더 행복한 표정을 짓는 편이에요. 그게 부자연스러워 보일 때도 있는데, 백마리 역은 확확 바뀌는 게 잘 어울리는 성격이라 과한 표정이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묻어난 것 같아요.

<닥터 프리즈너>, <검은태양>에 이어 <천원짜리 변호사>는 남궁민 씨와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에요. 또 함께 연기를 했는데, 어땠나요?

<닥터 프리즈너>는 한 신만 함께한 거라 호흡을 맞췄다고 하긴 어려웠어요. ‘와, 영광이다. 내가 남궁민 선배랑?’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고요. 사실 <검은태양>을 할 때도 같이 만들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은 있었지만, 자신감이 없었어요.이번에(<천원짜리 변호사>를 하면서)는 선배가 북돋아주고 함께 호흡하니 시간이 갈수록 잘 맞는 걸 느꼈어요. ‘역시 선배는 선배다. 왜 믿고 보는 배우라고 하는지 알겠다’는 생각을 했죠.

테크니컬 울 소재 니트 톱과 인디고 데님 팬츠 모두 Bottega Veneta.

<눈 떠보니 세명의 남자친구>에서 라희 역을 연기할 땐 캐릭터가 실제 성격과 비슷해 즐겁게 촬영했다고요. 반면 정반대 성격의 캐릭터를 맡을 때 몰입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있나요?

비슷한 역할을 할 때는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부분이 많아 재밌는데, 정반대 캐릭터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나올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조심하려 해요. 그 캐릭터는 저처럼 기뻐하지 않을 테니까요. ‘어떻게 기뻐할까, 어떤 제스처를 할까’ 하고 연구해요. 실제로 제 성격과 정반대인 친구나 캐릭터를 보고 공부하기도 하고요.

라희 같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 본모습이 종종 나오는지.

내 모습에서 시작하되 거기서 캐릭터를 조금 더 입히면서 방향을 잡아요. 백마리 같은 경우도 ‘나라면 이렇게 할 것 같은데, 마리는 여기서 한 번 더 오버할 것 같다’ 하면서 색을 입히는 거죠.

데뷔 이후에도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러한 경험이 연기에 도움이 됐나요?

저는 모든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어떤 경험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때의 내
가 있었기에 지금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면에선 큰 도움이 됐어요. 뭔가 열심히 하려던 마음이든, 아니면 다양한 사람을 만난 경험이든 그 시간을 통해 타인과 교류할 때 겁을 내지
않게 됐어요.

소속사에 들어가기 전에는 열심히 자기 PR을 했어요. 그러면서 여러 기회도 얻고.

계속 프로필을 돌리면서 ‘남들도 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어떻게 되겠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한테 누
군가 “쟤는 뭔데 지금 이렇게 잘되고 있는 거야?” 한다면, “저는 할 줄 아는 것도, 방법도 몰라서 그저 열심히만 했어요”라고 말할 거예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든 시절, 나중에 TV를 볼 때 ‘계속 연기할걸’ 후회할까 봐 포기하지 않았다고요. 언제까지 연기를 한다면 여한이 없을까요?

이 질문을 보고 계속 고민했는데, ‘너무 힘드니까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자’고 마음먹고 집안일을 하다 우
연히 TV를 봤을 때 드라마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나도 저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이 들까 봐. 그 마음으로 계속 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 언제 포기할 수 있을까. 정말 모르겠어요. 지금은 상상이 되지 않네요.

걱정이 무색하게, 이후 너무 잘됐어요.

제가 올해 서른인데, 사실 지금까지 부모님께 용돈 한번 못 드리고 오히려 돈을 받아 썼어요. 이런 힘듦이 있었기에 무색하진 않아요. 엄마, 아빠가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이제 잘해야죠.(웃음)

데뷔가 2016년이죠?

저도 그게 어려워요. 연기 공부를 시작한 걸로 따지면 스무 살 때부터 했지만 아직도 배우는 중이고, 현
장에 갈 때마다 늘 새로워요. ‘완벽하게 연기를 했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내 데뷔가 언제인지 연연하지도 않아요. 5년이 됐든, 10년이 됐든 계속 한다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팬들은 2016년에 찍은 박카스 광고를 기준으로 데뷔 주년을 축하해줘요. 소속사 없이 혼자 광고랑 드라마 단역 등으로 유일하게 TV에 나온
거라 그때를 기준으로 잡은 것 같아요. 만약 제게 ‘데뷔를 언제라고 하고 싶어요?’묻는다면
<닥터 프리즈너>나 그전에 출연한<타인은 지옥이다>를 기준으로 하고 싶네요.

지금까지 연기 활동을 돌아보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너무 많은데, 우선 힘든 시간을 버텨내던 시절이요. 눈물 날 정도예요. 예전에 아무것도 없을 땐 당돌하게 표현하곤 했는데, 뭔가 지키고 싶은 것이 늘고 위치나 배역이 생기니까 겁이 많아졌어요. 그때보다 요즘이 더 긴장되고 부담돼요. 그럼에도 김지은, 계속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나. 그래서 야생화라는
콘셉트가 너무 좋았어요. ‘나 아무렇게나 피진 않았구나’ 싶어서. 그리고 <검은태양>. 그때를 기점으로 김지은이란 배우가 있다는 걸 알리게 되어 의미가 커요. 마지막으로 지금이에요. 열심히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는 현재.

지난해는 <검은태양>, <어게인 마이 라이프>, <천원짜리 변호사>까지 세 작품 모두 좋은 성과를 냈고,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던 해라고 했어요. 새로운 2023년은 어땠으면 하나요?

감사하게도 연이어 작품을 했어요. 그동안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면, 조금 숨을 돌리면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제 자신이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천천히 갈 줄도 알고.

앞으로 배우로서 목표가 있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여유를 갖고 좋은 연기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 하나는 ‘단단한 배우’가 되는 거예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예전에 한 친구가 “너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데, 남이 너를 사랑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맞는 말이더라고요. 나도 날 사랑하지 않는데 시청자들이 날 사랑하길 바라는 건 욕심이죠. “너 이거 별로야!”라고 해도 “왜, 나 예쁜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이런모습이 사람 김지은보다 배우 김지은에게 정립되면 좋겠고요. 제겐 그런 당당함이 필요해요. 지금은 연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데, 언젠가 제가 극을 이끌어가는 장르도 해보고 싶어요.

에디터 김지수 사진 김외밀 헤어 라임(에이바이봄) 메이크업 고미영(에이바이봄) 스타일링 김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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