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단단한 ‘김윤혜’라는 이름으로
‘우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아이는 ‘서혜랑’으로 또 한번 각인되고, 이제는 ‘김윤혜’로 당당히 대중 앞에 서 있다.
<나의 완벽한 비서> 홍보 일정으로 한창 바쁘죠? 이렇게 화보 찍고 인터뷰도 하고 있어요. 평소 일상은 되게 평범해요. 하루를 차분하게 보내는 편이라 일어나서 청소한 뒤 맛있는 거 해 먹고, 영화나 드라마 챙겨 보고 책을 읽어요. 또 만들고 싶은 빵이나 과자가 생기면 유튜브 보면서 베이킹도 하고요.
최근에는 무슨 영화나 드라마, 책을 봤어요? 영화 <위키드>랑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도브>를 재밌게 봤어요. 사실 장르 가리지 않고 국내외 영화, 애니메이션 다 봐요. <블랙 도브>는 키이라 나이틀리도 좋아하고, 스릴러도 즐겨 보는데 중간중간 액션이 들어가서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책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샀는데 아직 조금밖에 안 읽어서 어땠다고 말하기가 애매하네요.(웃음) 정대건 작가의 <급류>도 궁금해서 오디오 북으로 조금 들었어요.
오디오 북을 이용할 정도라니, 책을 꽤 좋아하나 봐요. 사실 전자책이나 휴대폰보다는 종이로 보는 걸 선호하긴 해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선택해서 보는 편이에요.
이번 작품에서는 싱글맘 ‘정수현’을 연기해요. 준비하는 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정년이>에서 혜랑이 때 엄마 연기를 한 번 하긴 했어 요. 숨기는 아이라서 이모처럼 나왔지만. 원래 아이들을 좋아해요. 실제로 가까워져야 자연스러움이 묻어 나올 것 같아 현장에서는 최대한 아이들과 친해지려고 했어요. 편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온몸으로 놀아주고 다가갔죠.
캐릭터를 위해 특별히 참고한 작품도 있어요? 따로 본 작품은 없고, 그림책 작가니까 그림 그리는 분들의 평소 자세나 습관 같은 움직임을 배웠어요. 아주 잠깐씩 그림 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패드 사용법을 익혔죠. TV 보면서 색칠도 해보고, 한동안 집에서 패드를 끼고 살았어요.
지금까지 해온 인터뷰를 쭉 보면 ‘서혜랑’으로 분하기 위해 1년 간 하루 9시간의 소리와 무용 연습을 하고, <종말의 바보> 군인 역을 위해 관련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고 운동도 꾸준히 했더라고요. 원래 뭘 하든 제대로, 성실히 하려고 하는 편인가요? 맞아요. 뭔가를 배우면서 캐릭터화되는 게 재밌고, 준비하는 과정도 즐겨요. 그때 내가 성장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보람도 느끼죠.
낙천적 캐릭터가 본인과 비슷한 면이 많다고 했어요. 연기하면서 어떤 순간이 닮았다고 느꼈는지 궁금해요. 수현이도 무던한 성향에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잔잔한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대체로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씩씩한 느낌이 저랑 비슷해요. 사실 누구나 그런 부분은 가지고 있잖아요. 저 또한 부족한 부분이 있겠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려다 보니 감정 기복이 크지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 수현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고, 일상처럼 연기하려고 했어요.
누구나 그런 부분은 있을 거라고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요. 염세주의적인 사람도 있고,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사람도 있으니까. 저도 그렇고요.(웃음) 비결이 있을까요? 만약 화가 나면 바로 분출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좀 해봐요. 화라는 게 5분, 10분 정도 지나면 가라앉기도 하고 다른 감정으로 바뀌기도 하거든요. 바로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이성적으로 돌아보려고 해요. 그렇게 시간을 갖고 다시 상황을 바라보면 화도 누그러들죠. 저는 사실 좋은 일이 생겨도 너무 들뜨지 않아요. 기대만큼 실망도 크니까 더 그렇게 변한 것 같아요. 20년 가까이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도,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있었는데 결국 어떤 일이든 마무리된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정년이>에서 맡은 역할이 인상적이었고, 호평 받은 만큼 본인에게도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아요. 김윤혜에게 <정년이>는 어떤 의미인가요? 한정판 선물 같은 느낌이에요. 작품 그 자체로도 사랑하지만 힘들고 어려워도 행복했던 연습 과정, 작품을 하며 만난 동료들까지. 여러 의미로 이런 작품은 다시 못 만날 것 같아요. 소재 자체도 독특했고, 보여드릴 수 있는 모습도 많았고. 무대 연기 경험이 없었는데, 덕분에 무대에도 처음 서봤어요. 배우로서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고, 이 작품 안에 있었던 것 자체가 행운 같아요.
특히 서혜랑은 악역이지만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죠. 혜랑이는 화려하지만 안쓰러운 나의 일부 같다고 해야 할까요. 남을 해코지 하려는 건 잘못됐지만, 이 캐릭터를 연기하는 입장에서 이해하고 품어줘야 하는 부분도 많았어요. 나중에 혜랑이를 보는 분들이 언젠가 이 친구를 이해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연기를 했죠. 그런 점에서 마음이 많이 갔어요.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어요. <정년이> 전과 후 시간을 비교할 때는 어떤가요? <정년이> 이후로는 팬들에게 편지도 받았어요. <나의 완벽한 비서>에 나오는 제 모습을 보고 “혜랑이다!” 하고 기억해주는 분도 있었어요. 더 많은 분이 제 작품을 봐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편지에 제 전작도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구나’ 느꼈죠.
<정년이>와 <나의 완벽한 비서>를 비슷한 시기에 찍었죠. 상반된 캐릭터를 오가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그 시간을 신선한 도전이라 여겼다”고 말했더군요. 연기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여행 같아요. 매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저를 발견하죠.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있기도 하지만 또 하고 싶고, 가고 싶은 느낌이라 저한테는 설레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어요. 늘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점에서도 그래요. 비슷한 결의 캐릭터를 연기 할 순 있지만, 아무리 자주 가는 여행지에서도 매번 다른 걸 느끼는 것처럼요.
배우 데뷔 18년 차에 접어들었어요. 오랜 시간 같은 일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나 원동력이 궁금해요. 기본적으로 이 일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해요. 한 작품이 끝나면 새로운 걸 하고 싶고, 또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죠. 그러다 보니 잘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배우는 기다림과도 직결되죠. 가깝게는 현장에서도 기다리고, 어떤 작품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빛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공백기나 작품 활동을 적게 할 때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다같이 갈 수 없고, 같이 시작하더라도 도착하는 시간과 지점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라고 인정하는 것도 중요해요. 공백기가 있을 때도 내게 필요한 것,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했어요. 그냥 내 길을 가고 있다는 마음으로 현실에 충실하고, 필요하다면 연기 공부든 작품을 보든 책을 읽든 했죠.
지난 배우 김윤혜의 시간도 근사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앞으로의 시간이 보다 기대돼요.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본인에게 바라는 점이나 목표가 있다면. 배우로서는 스스로 한계를 두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도전을 멈추게 되고 더 나아갈 수 없을 거예요. 실패하고 넘어지고 망하면 뭐 어때요?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닌데. 그래야 내가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으로서는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 내 자신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없는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 게 힘든데, 그런 것들이 자연스러워졌으면 해요. 나이가 들면서 계속 드는 생각인데 남한테 보여주는 관대함을 자기한테도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 할머니가 되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