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과 절제가 교차하는 안효섭의 지금
THE QUIET STANDARD.

버건디 스웨이드 재킷과 셔츠 모두 Berluti.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르네요. 그러게요. 작품을 끝낸 지 꽤 됐는데, 여전히 반응이 이어지니 신기하긴 해요.(웃음) 확실히 이전에 비해 어린 친구들이 많이 알아봐요. 요즘은 제 이름보다 ‘진우’라고 불러주는 분이 더 많고요.
최근 <CBS 뉴스 24/7>과 라이브 인터뷰도 했더군요. 사실 좀 민망해요. 보이스 액터로 참여하긴 했지만, 감독님과 제작진의 공이 훨씬 커서 “내 작품이다”라고 말하긴 좀 부끄럽죠.
보이스 연기는 또 다른 결의 연기죠.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처음엔 막막했어요. 드로잉 정도의 스케치만 본 터라 감정선을 잡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다행히 감독님이 세심하게 디테일을 짚어주셔서 점점 감을 잡아갔어요. 분명 기존 연기와 다른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결국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평소 연기하듯 대본을 보며 진우가 살아온 삶에 집중했어요.
과거 인터뷰를 쭉 보다가 효섭 씨의 나이를 다시 찾아봤는데, 나이로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서른 살답지 않게 깊고 진지하다고 생각했어요. 알프레드 아들러의 이론에 깊이 공감할 줄 알고, 철학 서적을 즐겨 읽으며, 끊임없이 사유하고 성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거든요. 이런 성향은 배우가 되면서 생긴 건가요? 어릴 때부터 궁금한 게 많았어요.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왜 손가락이 열 개일까?’처럼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늘 의문을 가졌었죠.
부모님이 꽤 힘드셨겠어요.(웃음) 여쭤보진 않았는데,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가족 모두 늘 질문이 많았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반드시 답을 찾나요? 그런 편이에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한때는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럴 때 그 감정에 매몰되거나 덮어두고 다른 걸 하기보다는 책을 읽거나 스스로 곱씹으면서 그 이유를 찾으려 했어요. 그러고 나선 뭘 해야 할지 생각하는 거죠. 정답은 없지만, 제가 세워둔 하나의 원칙이 있어요. ‘바꿀 수 없는 건 바꾸려 하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요? 이미 일어난 일 같은 거죠. 사소한 예로, 제가 누군가에게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을 했어요. 그러면 자책하기보다는 ‘그 사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어떻게 풀어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식이죠. 일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오늘따라 헤어스타일이 잘됐는데,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요. 하지만 제가 바람을 컨트롤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럴 땐 스프레이를 더 뿌리든지 현실적인 방법을 찾는 거죠. 그러다 보면 마음이 한결 편해져요.

네이비 재킷 Dior Men.
요즘 자주 떠올리는 ‘왜’는 뭔가요? 흠, 지금은 딱히 없네요. 적어도 서른 살의 제게 필요한 답을 찾은 것 같아요.
그게 뭐죠? ‘힘들어야 한다’는 것. 계속 도전하는 환경 속에서 감당할 만큼 에너지를 쓰는 것. 너무 힘들지도, 편하지도 않은 지점에서 중심을 잡는 거죠.
그게 어렵죠.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이 있나요? ‘인지’하는 거죠. 내가 지금 자극을 과하게 추구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아차리는 거예요. 넘침과 부족함, 그 정도를 알면 조절할 수 있죠. 일도, 인간관계도 같아요. 몰입했다면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도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야 일도, 사람도, 행복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계기가 있어요? 최근에 <도파미네이션>을 읽었어요. 그 뒤로 쇼펜하우어 철학에 대한 글도 봤고요. 거의 200년 전 시대인 데다 분야는 다르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같더군요. 고통과 행복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 아직 완독하진 않았지만, 니체의 <위버멘쉬(U¨bermensch)>도 비슷한 맥락이더라고요. 고난 앞에서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 초인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그 경지에 도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베이지 니트 스웨터 Ferragamo.
불가능해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특히 마지막 대답을 들으니 오늘 불가리 워치 촬영과 참 잘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불가능해도 나아가려는 태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한계를 넘고자 하는 노력, 또 시간을 초월한 것들의 가치를 알아보는 시선. 이런 모습이 불가리의 미학과 자연스럽게 겹쳐 보여요.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문득 시계 취향도 궁금하네요. 오늘 촬영하면서 눈에 들어온 시계가 있나요? 있어요. 그레이 옥토 피니씨모 워치요. 굉장히 얇고 세련됐더라고요. 개인적으로 화려한 시계보다는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디자인을 선호하는 편이라 마음에 들어요.
단정한 모습이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책을 읽고 사유하는 시간이 연기에도 도움이 되나요? 결국 연기도 인물을 탐구하는 일이니까. 그렇게 연결해본 적은 없지만, 그럴 수도 있죠.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통해 배우는 것도 있나요? 배운다기보다는 캐릭터에 저를 대입하면서 발견하는 게 있어요. <낭만닥터 김사부 2>의 우진이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잖아요. 이타적이고 뜨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런 마음이 있었을까’ 스스로 물어보죠. 우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은 못했을 거예요. 반대로, <사내맞선>의 강태무처럼 거친 말이나 행동을 해야 할 땐 거부감이 들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이런 말과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됐죠. 어찌 보면 연기는 저 스스로를 알아가는 매개인 것 같아요.

블랙 레더 재킷 Recto.
뜬금없지만, 앞에서 ‘초인’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묻고 싶어요. 혹시 되어보고 싶은 인물이 있나요? 최근에는 없는데, 어릴 때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판타지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해리 포터처럼 지칠 줄 모르는 힘센 영웅.(웃음)
배우로서 연기해보고 싶은 인물은요? 나이가 들면 영화 <양들의 침묵> 속 안소니 홉킨스 같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정적임에도 존재감이 압도적이잖아요. TV를 뚫고 나오는 그 전율이 너무 강해서 언젠가 그런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고등학생 때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왔고, 연기 전공자도 아니었죠. 낯선 환경에서 해보지 않은 것을 한다는게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10년을 버텼나요? 처음엔 많이 힘들었어요. 현장에 가기 전 겁부터 났죠. 그런데 꾹 참고 하나씩 해내다 보니 조금씩 재미가 붙더군요. 게임도 그렇잖아요. 처음엔 잘 못하면 재미없지만, 손에 익으며 재미있어지는 것처럼요. 연기도 그랬어요. 하면 할수록 보이는 것이 생기니 버틸 힘이 생기더라고요.

화이트 턱시도 셔츠와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분투했던 시간이 필모그래피에 여실히 드러나더군요. 한 해도 쉬지 않고 사극부터 판타지까지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어요. 막상 작품에 들어가면 ‘왜 이렇게 힘든 걸 골랐을까’ 싶다가도 결국 그런 대본에 끌려요.(웃음) 새로운 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작품이요.
연습생 생활을 하다 배우로 전향했죠. 좋아하는 게 일이 되면 힘들다고 말한 적이 있던데, 연기는 다른가요? 연기는 매번 새로워서 좋아요. 상황도, 만나는 사람도 늘 다르니까요. 무엇보다 연기가 일이라고 하기에는 즐거움이 더 커요.
일을 즐길 수 있다는 건 축복이네요.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습니다.(웃음)
연기의 즐거움은 언제 가장 크게 느끼나요? 리허설 때요. 머릿속 그림이 모여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어질 때 가장 설레요. 제가 상상했던 방향이 현장에서 달라질 때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해석이 나올 때도 있는데 대화하고 조율하면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즐겁고 귀하게 느껴져요.

플라워 프린트 셔츠와 팬츠 모두 Ami.
학창 시절 바이올린도 배우고, 교내에서 달리기 선수로 뛸 만큼 운동도 곧잘 했다고요. 미련은 없나요? 바이올린을 6~7년간 배웠고, 오케스트라 활동도 했죠. 클래식 음악은 ‘언어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어릴 때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바이올린을 통해 많이 해소한 것 같아요. 연주를 끝내면 후련함 같은 게 있었거든요. 운동도 마찬가지고요. 미련은 없어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전혀 상상해보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안 할 것 같아요.
왜죠? 주어진 작품을 열심히, 재미있게 하다 보면 어디로든 흘러가겠죠.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려고 해요. 지금은 연기를 할수록 퍼즐을 맞춰가는 느낌이에요. 어떤 그림인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사람 안효섭은 어떻게 나이 들어갈지 궁금해요.

블랙 실크 톱 Heon Kim.
사람 안효섭의 미래는 왜 궁금한가요? 하루하루가 재미있어요. 10대와 20대가 달랐고, 20대와 30대가 또 달라요. 계속 탈피하고 있는 느낌이죠. 그래서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궁금해요. 그리고 배우이기 전에 한 사람이잖아요. 그 삶이 건강해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릇이 큰 사람. 스스로 감정을 잘 다스리고, 타인의 감정도 헤아릴 줄 알고, 행복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브라운 실크 셔츠와 팬츠 모두 Heon Kim.
계속 도전하는 환경 속에서 감당할 만큼 에너지를 쓰는 것.
너무 힘들지도, 편하지도 않은 지점에서 중심을 잡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