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교환 방식대로
묵직한 공기가 감도는 찰나 유머가 스멀스멀 비집고 들어온다.
배우 구교환을 알아갈 때 방심은 금물이다.
이 남자, 밀당의 귀재이니.
오늘 화보를 촬영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어요. 시크한 콘셉트라 그런지 계속 과묵한 모습이던데 평소에는 유머러스하잖아요.
촬영 제품과 의상을 혼자 조용히 즐기고 있었어요. 티가 안 났나 봐요. 아! 그리고 배가 고프다는 생각도 잠깐 했습니다.(웃음)
즐겼다니 다행이네요. <길복순>이 이미 공개되었고, <탈주>, <박하경 여행기>, <신인류 전쟁: 부활남>, <기생수: 더 그레이>, <왕을 찾아서> 등 공개 예정인 작품이 상당히 많네요.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겠어요.
배우가 연기하는 게 당연한 거라서….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죠. 지금은 <왕을 찾아서> 촬영 중이고, 곧
<부활남> 촬영에 들어갑니다.
작품이나 캐릭터를 선택하는 기준은 뭔가요?
한 장면, 한 줄의 대사라도 끌리는 부분이 있으면 시작해요. 제 취향이죠. 카페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처음 듣는 노래인데 좋으면 어떻게든 찾아내잖아요. 그것처럼 취향의 접점이 보이면 선택해요. 끌리면 더 알아가고 싶으니까. 연애 같은 거죠.
구교환은 캐릭터를 그려내는 방식이 궁금해지는 배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차기작에 대한 기대도 높고요. 개봉을 앞둔 작품 중 신선했던 캐릭터가 있나요?
신선도는 오히려 관객이 느껴야죠. 저는 과일 고르듯 캐릭터를 선택하니 늘 신선도 100%로 임하고요. 매번 새롭게 연기하려고 해요. 로튼 토마토 지수처럼 결과물에 대한 신선도는 관객에게 맡길게요.(웃음)
요즘처럼 끊임없이 작품을 소화할 때는 오롯이 구교환이 되는 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전 캐릭터를 아카데믹하게 탐구하진 않아요. 즐기려고 하죠. 제 캐릭터의 시작점은 저예요. ‘내가 만약 그 사람이라면’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죠. 물론 제 버릇이나 성질을 끌어오진 않지만, 상황을 가정하는 거예요. 기자님은 인터뷰 현장에 오기 전까지 어땠어요? 오늘 구교환 만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하셨나요?
당연히 하죠. 인터뷰가 끝나기 전까지는 일상에서 계속 생각했죠.
아, 그래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니고.(웃음) 연기를 할 때 그렇게 하면 지치는 것 같아요. 항상 초면인 것처럼 마주하려 해요. 그 인물의 전사를 파거나 학습하지 않고 캐릭터에 함몰되지 않아요. 저랑은 맞지 않는 방식이죠. 최대한 그 캐릭터와 함께 놀려고 해요. 캐릭터의 신선도를 위해서는 오히려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에요. 그냥 음악을 들으면서 떠올려보기도 하고, 캐릭터를 생각하며 농담도 하고요. 소소한 순간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거든요.
<D.P.> 시즌 2에 대한 기대가 높아요. 공개 전이니,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느낌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감독님, 진짜 빨리 쓰셨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웃음) 감독님은 시즌 1 후반 작업
을 하면서 이미 기초공사를 끝낸 걸로 알고 있어요.
한호열을 다시 만나니 어땠나요?
속편은 처음 경험해보는데, 다시 만나 반가웠죠. 익숙하지만 새롭기도 했거든요. 한호열은 시즌 2에서도 한호열이어야 하잖아요. 매회 어떤 사건을 마주하느냐가 호열이를 변화시키는 지점인데, 그 부분에서는 시청자들도 처음 보게 되는 모습이 있을 거예요. 물론 유머에 기반을 둔 캐릭터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달라요. 한호열이 처음에 어떻게 등장하죠?
목욕탕에서 유머러스하게 등장했죠.
그렇게 등장했지만, 마지막 장면에선 호열이가 울고 있었단 말이에요. 처음 얼굴과 마지막 얼굴이 다른 것처럼 시즌 2에서도 그런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인물은 그대로지만,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또 관심을 모으고 있는 작품이 <탈주>예요. 이제훈 씨가 청룡영화제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고 싶은 배우로 구교환씨를 언급했는데, 이 작품으로 현실이 됐죠. 지난 호 이제훈 씨와 인터뷰를 하면서 구교환 씨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고요.
뭐라고 하던가요?
성공한 덕후라고.
오, 그럼 전 더 성공한 덕후!(웃음) 이제훈 씨는 제게 배우고 연예인이었죠.
작품으로 만나니 어떤가요?
이 작품을 선택한 여러 이유 중에는 제훈 씨도 포함돼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굉장한 시네필이 느껴졌고, 서로 애정을 확인한 작업이었어요. 제가 제훈 씨를 추격하는 이야기인데… 아, 장면을 예로 말씀드리고 싶지만, 이것도 스포일러라. 죄송해요.
이해해요. 차기작 외에도 구교환 씨를 인터뷰할 소재는 많으니까요. 제작 보고회나 인터뷰 영상을 보면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던데, 요즘은 그런 자리에 좀 익숙해졌나요?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게 어색하면서도 좋아요. 즐기고 있어요.(웃음) 때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어제는 <왕을 찾아서>를 촬영하고 왔는데, 똑같은 구교환이지만 촬영장에 있던 구교환과 여기에서의 구교환은 사실 많이 달라요. 오늘 화보는 자기애가 강해야 했죠.(웃음) 상황이나 상대에 따라 제 태도나 분위기도 바뀌어요. 기자님도 여러 사람을 만날 텐데, 그때마다 다르지 않나요?
그렇죠. 이렇게 질문을 많이 던지는 인터뷰이를 만난 것도 처음이라, 평소와 다른 리액션이 나오네요. 오늘처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기대도 되고, 긴장도 되죠.
맞아요. 긴장을 전혀 안 한다는 건 거짓말 같아요. 저는 단단한 게 더 무서워요. 그래서 육교가 흔들리는 게 너무 좋아요. 흔들려야 버틸 수 있잖아요. 너무 단단해지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좋은 말이네요.
제가 연출한 영화 속 대사예요. <플라이 투 더 스카이>.
아! 노량진 육교에서 교환과 성환이 나눈 대화죠. 지금 들으니 새롭네요.
네.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원래 육교는 흔들려야 해”라고 말하죠. 살면서 시행착오도 겪는데, 당연한 거예요. 그렇다고 실수해도 괜찮은건 아니고, 그것 또한 작업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때론 실수를 했지만 실수가 드러나지 않거나 그 실수를 이겨내면 실수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거든요. 전 사실 실수하고 칭찬받을 때도 있었어요.
그게 언제인가요?
제 작품에서 좀 많이 느껴요. ‘실수’ 보다는 ‘우연’이 맞겠네요. 우연이라고 정정할게요. 우연으로 예상 외 좋은 장면을 만들어낸 적도 있어요.
이를테면?
인상적인 걸 말씀드려야 하는데…. 음, 생각해볼게요.
남은 인터뷰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하니, 다음 질문을 드릴게요.
편하게 준비한 질문 다 하세요. 제가 워낙 말주변이 없어 최대한 답변해야 할 것 같아요. 편집하려면 소스가 많아야 하잖아요.(웃음) 아무튼, 앞 질문에 답하자면 영화 <메기>에서 잠자는 장면이에요. 그때 정말 잠들었고, 깨어나니 그 장면이 끝나 있었어요. 저도 개운하고 감독님도 만족스러운, 모두가 개운한 장면이 탄생했죠.(웃음) 제가 잠든 걸 눈치채고 카메라를 돌려주신 감독님께 감사드립니다.
본인 연출작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게요. 9년 전 유튜브 채널 ‘2X9HD’를 만들었죠?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나요?
특별한 의도는 없었고, 이옥섭 감독과 제가 연출한 단편영화를 아카이빙하려고 시작했어요. 극장에서 상영할 기회도 영화제도 적잖아요. 지금은 더 적어서 너무 안타까운데….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봐줬으면 하는 마음에 올리기 시작했어요.
구교환 연출작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N차’ 보게 된다는 점. 숨은그림찾기를 하듯이 곳곳에 메타포가 숨어 있고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데, 의도하는 연출방향인가요?
의도를 가지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 건 아니에요. 제가 그냥 그런 부류의 사람인 것 같아요. 뭔가를 방정식처럼 풀 줄 아는 연출가였다면 명쾌한 작품이 나왔겠죠. 저라는 사람의 기질이 연출에서도, 연기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저 스스로는 굉장히 명확하다고 생각하며 연출했어요. 그런데 누군가 “이거 해석 좀…” 하고 말하면 난감하죠.(웃음) 사실 저도 다른 작품을 볼 때 해석이 궁금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일부러 안 물어봐요. 답이 내려지면 재미가 없어요. 어떤 영화를 본 다음 그걸 이리저리 조립하며 갖고 노는 게 좋거든요. 그것 또한 제가 만든 거잖아요.
작품을 보면 독특한 발상에 매번 감탄하게 돼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싶은 지점이 꽤 많거든요. 또 달리 보면 메시지나 소재는 생활 밀착형 같기도 하고요.
경험을 토대로 한 것도 있지만, 픽션도 있어요. 양치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는 없으니까요(<웰컴 투 마이 홈> 장면). 또 눈알을 던져 누군가를 보여주지는 않잖아요(<로미오: 눈을 가진 죄>, 이옥섭 감독). 연기나 연출에서 제 캐릭터들이 어느 때는 굉장히 비현실적이었으면 싶고, 어떤 때는 현실에 착 붙어 있으면 좋겠어요. 두 가지의 공존과 밸런스를 맞추려고 하죠. 일부러 계산해서 하는 건 아니고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보통 작품 구상은 어디에서 출발하나요?
대중문화나 사물일 수도 있고, 하나의 이미지일 때도 있어요. 어떤 건 엔딩부터 시작하기도 하고. 제가 꽂힌 음악을 사용하고 싶어 영화를 만들기도 해요. 굉장히 사적인 것에서 출발하죠.
일상에서 통찰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사적인 걸로 시작을 해야 몰입이 잘 되더라고요.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경우 엔딩에 삽입한 그 음악(The New Mystikal Troubadours-‘All New Blooming’)을 쓰고 싶어 시작하기도 했고, 노량진 육교가 철거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감을 받은 것도 있어요.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사적 취향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출발점인 것 같아요.
노량진 육교와 얽힌 추억이 있나요?
거길 자주 지나다녔는데, 어느 날 철거 현수막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캐릭터가 떠오
르고, 질문이 생기고, 그런 것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거죠. 굴삭기는 뭔가를 파내는 장비인데, 중장비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이 노량진 육교가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하며 안타까워하는 것도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어요.
구교환의 작품이나 일상에서 유머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거죠?
가만히 있는 제게 누군가가 유머를 툭 던지면 긴장이 싹 풀려요. 유머는 배려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기분 좋은 경험이 있어 저도 유머를 던지려고 하죠. 다만 그게 우스꽝스럽지 않으면 좋겠어요.
우스꽝스럽진 않죠. 점잖은 한마디 유머지만 파동이 크기도 하니까요.
굳이 소리내지 않아도 미소 짓게 해주는 것도 유머고 재치라고 생각해요. 지금 저희가 되게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전 재미있거든요. 재미있죠?(웃음) 막 어깨동무를 하지 않아도 편할 수 있잖아요. 제가 사전 질문지를 쓱 읽는데, 굉장히 강력하고 토론 같은 분위기가 될 것 같다고 혼자 오해했거든요. 그런데 만나보니 전혀 다른 분위기네요. 그런 의미에서 문자는 위험해요. 소설이나 만화책은 각자 해석의 여지가 필요한 영역이니
다른 경우고요.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다 여기까지 왔죠?(웃음)
(웃음) 흐름은 자연스러웠어요. 그런데 저도 지금 그래요. 육성을 들으니 지난 구교환 씨의 인터뷰를 읽을 때 상상했던 이미지와 또 다르네요.
인터뷰할 때마다 느끼는 게 있어요. 항상 같은 대답을 하는데, 인터뷰를 읽으면 생경해 보이는 제 모습이 있어요. 인터뷰한 분들이 느낀 대로 담아내기 때문이겠죠. 남이 바라보는 제 모습을 마주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
은 아니기에 더 재미있어요. 별자리를 찾아볼 때의 호기심이랄까.(웃음) 흥미로워요.
구교환의 연출작을 기다리는 분이 많아요. 작품 구상도 틈틈이 하고 있나요?
하고 있죠. 요즘은 거대한 꿈이 있어요! 장편영화나 많은 대중이 볼 수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일 수도, OTT 작품이나 시리즈물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연출과 연기 두 가지를 병행하기는 힘들죠?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요즘은 연기하는 게 재미있어요. 그건 저 스스로도 인정해야 해요.
요즘 부쩍 연기가 재미있어진 이유는 뭘까요?
이전보다 관객과 친밀해진 것 같아 더 재미를 느껴요. 부끄럽고 어색했던 것도 나아지고 있고요.
상황을 가정한 질문이에요. 본인 작품을 연출하느라 제안이 들어온 작품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모든 걸 제쳐두고 응하고 싶은 섭외 제안이나 작품이 있을까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영화의 스케일이 크든 적든 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많은 사람과 약속된 거니 배신할 순 없죠.
우문이었네요. 그럼, 작품 구상 단계일 때로 가정한다면?
셈을 하겠죠. 무엇을 선택해야 더 좋은 결과에 도달할까.(웃음) 농담이고. 앞에서 독립 영화 작업을 할 때와 지금 달라진 점을 물어보셨는데 사실 거만해 보일까 봐 답을 안 했지만 그때도 캐스팅 제안은 들어왔고, 큰 역할도 있었어요. 다만, 당시엔 연출에 대한 애정이 더 커서 거절했죠. 일단 제가 좋아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해야지 스스로도 만족한다고 생각해요. 주변 사람들이 “이 작품 좋대”, “이거 하면 유명해질 거야”라고 말해도 흥미를 느껴야 움직이는 것 같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방식으로 관객과 만나는 거죠. 그게 연기고, 연출이에요.
결국 재미를 좇아 여기까지 온 거네요. 돌이켜보면 그 선택에 감사하겠어요.
그걸 제가 어디에서 느끼는지 아세요? 제 사진으로 만든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 짤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할 줄 몰랐어요. 재미있으려고 찍은 게 아니거든요. 그림이 잘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찍
었어요.(웃음) 제 과거 모습을 가지고 또 다른 창작물을 만들어주신 거죠. 그분들도 작가고, 연출가라고 생각해요. 저는 일단 제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재미있게 하면 돼요. 그 결과가 어디로 흘러가고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제 손을 떠난 이야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