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이현욱
골똘히 걱정하고 대담하게 꿈꾼다.
그 남자가 살아가는 보통의 하루.
2년 전부터 영화 <엑시던트>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나올 때가 된 듯한데.
그러게 말이다. 나도 답답한 기분이다. 함께 촬영한 (탕)준상이는 어느새 성인이 되어버렸다. 고등학생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웃음)
원작인 홍콩 영화와 어떻게 다를지 기대된다. 힌트는 없나?
(강)동원이 형 시점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다. 나, 이미숙 선배, 준상이가 형과 팀을 이뤄 움직이고. 캐릭터 설정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만, 아직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다.
티빙 드라마 <샤크: 더 스톰>도 공개를 앞두고 있다. 묵혀둔 것을 조금씩 풀어간다는 점에서 설렘이 크겠다.
그건 오해다. 물론 하나하나 소중한 작품이지만, 촬영이 끝나면 (그 존재를) 바로 잊는다. 원체 작품이나 역할에 잠식되는 걸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그래서 작품이 공개될 때도 특별한 감정은 없다.
넷플릭스 드라마 <도적: 칼의 소리>는 어땠나? 일제 군장교 ‘이광일’ 역으로 열연해 화제였다.
조금 달랐다. 이 정도로 스스로를 깊이 되돌아본 작품이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깊이 되돌아보니 어떤 자신이 있던가?
부족하고 못난 내 모습이 있었다. 섬세한 부분이 많이 약하다. 그러고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은 거다.
유튜브 콘텐츠 댓글에는 ‘일본 제복마저 잘 소화했다’는 평이 있던데. 그만큼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랬나?(웃음)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높기 때문에 칭찬도 흘려듣는 편이다. 좋게 봐주신 부분은 감사하지만, 거기에 매몰될까 봐 나 자신을 믿지 못한다. ‘내가 연기를 오래 할 수 있을까?’, ‘나한테 진짜 재능이 있긴 한 걸까?’ 이런 고민이 여전히 불쑥불쑥 찾아온다. 안주할 수 없는 성격인 거다. 물론 안주해서도 안 되고.
‘이광일’ 역을 맡고 나서 성장한 부분은 없나?
작품을 보면서 깊이 반성했다는 건, 돌이켜보면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의미다. 내가 부족한 걸 인지하는 순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그 길이 보이니까. 자기 주제 파악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일이다. 보기 싫은 내 모습을 힘들더라도 계속 마주해야 한다.
어떻게든 배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강박이 보인다.
강박이라, 그렇다고 거기에 빠져 살진 않는다.(웃음) 정말 분리된 삶이다. 물론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일상에서까지 몰입하는 분도 있지만, 그게 꼭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광일’은 매 순간 불안감에 빠지는 남자지만, 나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고 보면 ‘이광일’은 확실히 기존 악역과 결이 다른 캐릭터다.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특별히 고민한 부분이 있다면.
항상 딜레마에 빠져 있는 인물인 만큼 비열함보다는 불안감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이런 인물들의 특징이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겁도 많고 불안한 성격이지 않나. 그런 것을 기저에 깔고 시대적 야망을 더하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인지 기존에 내가 해온 현대극의 악역보다 표정 연기도 더 과감해졌다. 극 중 ‘이광일’이 손가락에 총 맞는 장면이 있는데, 그토록 두려워하는 표정은 나조차도 처음 발견한 얼굴이었다.
작품을 보면서 깊이 반성했다는 건, 돌이켜보면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의미다.
내가 부족한 걸 인지하는 순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그 길이 보이니까.
숙부를 고문하는 장면도 표정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는 평이 많다.
가장 많이 고민한 장면이다. 감독님은 되도록 긴장감 있고 비인간적인 연기를 보여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난 오히려 복잡한 심경 연기를 드러내는 게 인물의 서사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여러 번 고민하고 감독님과 의논한 끝에 나온 결과다. 참 쉽지 않은 캐릭터다.
OCN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유기혁’을 연기할 때와 악역을 수행하는 데 어떤 부분이 달랐나?
사실 ‘유기혁’을 연기할 때는 오히려 크게 어려운 부분이 없었다. 별다른 힘을 안 줘도 감독님이 바로바로 오케이해주시더라.(웃음) 사이코패스에게는 누군가를 해하는 일이 ‘놀이’ 개념이지 않나. 그래서 일상이라면 오히려 힘을 안 주고 대화하는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이광일’은 냉혈한이지만 극 중 가장 비극적인 캐릭터다. 왜, 살다 보면 남자끼리도 가장 동경하는 친구가 있지 않나. ‘이광일’에게는 그 존재가 ‘이윤’이 아닐까 생각했다. 항상 내 옆에 있었으면 하는 친구가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갖게 될 때 올라오는 열등감과 반발심, 그것으로 뭉쳐진 인간인 셈이다. 이렇듯 입체적 배역인 만큼 해석하고 고민하는 데 (‘유기혁’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잇따른 악역 역할이 이미지를 굳힐 수 있다는 걱정은 없나?
처음에는 고민이 컸다. 악역으로 임팩트를 보여줬으니 이번엔 선역을 선보여야 하는 순서일까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어리석은 고민이더라. 일단 아직 내가 소화한 작품이 많지 않다. 거기에 악역이더라도 작품의 성격이나 시대, 배역의 특성에 따라 제각각 다른 모습일 텐데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이정재 선배도 <관상>,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암살> 에서 각각 다른 느낌의 악역 연기를 펼치지 않았나. 그렇게 따져보면 결국 내 실력의 문제다. 악역이더라도 다른 색깔로 흡수시킬 수 있는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 누가 보든지 곧바로 수긍할 수 있는 그런 연기를 선보여야 좋은 배우가 아닐까.
이렇게 엄격한 자아비판을 들으려고 질문한 건 아니었는데.
미안하다.(웃음) 습관이 된 것 같다. 갈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게 연기라서. 평생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지 않을까 싶다.
JTBC 드라마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 tvN <마인>, 넷플릭스 <블랙의 신부>와 <도적: 칼의 소리>까지 작품 리스트가 즐비하다. 이 정도면 최근 배우들 중 가장 가파른 상승 곡선을 탄 것 아닌가?
감사하긴 하지만, 그 말은 비약이 심하다. 물론 내 기준 속 성공의 기준을 이미 벗어난 지 오래다. 이 정도로 활동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거든. 경제 상황도 나쁘지 않다. 어릴 때부터 물질적 욕심이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벌어보니 난 (욕심이) 작은 편에 속하더라. 이제 딱 주변 사람들 챙길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돈이야 더 벌면 좋겠지만,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
모종의 이유로 물질적 가치관이 바뀌었나 보다.
사실 그렇게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웃음) 수익이 하나도 없을 때 갖고 싶던 것들을 하나둘씩 사보니 그저 ‘판타지’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비싼 물건, 비싼 음식이니 보긴 좋지. 하지만 그게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순 없다는 의미다.
그런 판타지를 성취한 지는 얼마나 됐나?
얼마 안 됐다. 4~5년 정도? 30대 중반까지는 경제적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없으면 안 쓰고 안 나가는 성격이라 무리하면서 살진 않은 것 같다. 술도 안 마시다 보니 사람들이 점점 안 불러주더라.(웃음) 나를 부르면 내 술값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그러고 보면 배우는 참 어려운 직업이다.
맞다. 예전에 30대 중반부터 얼굴을 널리 알린 한 선배가 우스갯소리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잘해서 된 게 아니야. 이 나이까지 버티고 주변을 보니 다 그만뒀더라”라고.(웃음) 나는 사실 돌아갈 곳이 없었기에 버틴 것도 있다. 중학생 때부터 쭉 이어온직업인 만큼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러던 중 다행히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어떤 터닝 포인트?
어느 순간 침대에 누워 있다가 현실을 직시하게 된 거다. 그저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기웃거리다 포기하는 애들과 내 모습이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때부터 물불 안가리고 달려든 것 같다. 안 그랬으면 연기하는 기분만 느끼다 그만둘 수도 있었던 거지.
그 자체가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방증 아닌가.
비교적 그런 편이긴 하다. 서현우라는 배우와 7년간 같이 살면서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나눴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시간은 꼭 챙겼을거다. 연기 테크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연기에 대해서 말이다.
꽤 철학적 대화처럼 들리는데.
그렇지도 않다.(웃음) 서로 연기할 때 이런 정서를 갖는 게 맞는 건지 끊임없이 토론했다. 그때 그 시간이 참 값지다는 생각을 한다. 내 연기 지론을 만든 시간이니까.
이런 토론 주제는 어떤가? ‘쉽게 보여줄 수 있는 연기자’, ‘치열하게 만들어내는 연기자’ 이렇게 두 가지길이 있다면 본인은 어느 쪽에 더 닿고 싶은지.
당연히 후자다. 어릴 때는 송강호 선배, 최민식 선배가 그저 부러웠다. 저렇게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가 가능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더라. 하지만 주요 배역을 맡아보고 깨달은 사실은 내로라하는 선배들이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는 거다. 배우로서 명성을 얻으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기대하는 시선이 이어진다. 경우에 따라 그게 부담이 될 수 있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차라리 부딪혀서 깨지고, 깨지면 또 일어나 부딪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치열한 시간 속에서 조금이라도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배우로.
동경하는 배우의 작품도 찾아 보는 편인지 궁금하다.
의외로 거의 안 본다. 어차피 내 것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정답의 근사치’처럼 상상력에 한계를 긋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분명히 참고는 되겠지만 그게 최선의 연기, 정답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다. 그래선 안 되지.
연기를 논할 때 특히 더 고집스러워 보인다. 이 길을 놓고 싶을 때는 없었나?
물론 있었다. 정확히는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할까 고민한 적 있다. 내 꿈 좇자고 가족들을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돈 벌어서 가족들한테 용돈도 드릴 나이에 나는 그렇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고향에 자주 안 갔다. 거기 가면 마음이 약해지더라. 자꾸 내가 이기적으로 느껴지고.
다행히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겠다.
(고향에) 못 가는 게 습관이 되어버려서 가족들과 오래 못 있겠더라. 가족들이 옆에 있어도 울적하고 그리운 기분이 든다. 행복하지만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할까 봐 불안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참 여러모로 좋든 싫든 안주하기 힘든 삶이다.(웃음)
어느새 불혹을 앞둔 1985년생이더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달라졌음을 느끼나?
최근 들어 후회를 많이 한다. 내가 성격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 화도 많고 감정적일 때도 많은데,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진 않았나 돌아보곤 한다. 아울러 인생에서 선천적으로 좋은 사람은 못 되겠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은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스스로에게는 관대하지 않더라도 타인에게는 관대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너무 모범 답안이다.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데, 그러면 뭐라고 하나? 노력이라도 해야지.(웃음)
인터뷰가 공개될 즈음에는 초겨울에 접어들 거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이루고 싶은 건 없나?
음.(긴 정적 이후) 미안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다.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단 한 번도없어서. 계획은 항상 틀어지기 마련이고 그 틀어진 길을 걷다 보면 답답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계획을 따로 세우지 않는다. 이건 아마 모범 답안이 아닐 거다.(웃음)